<분수대>고미카와와 도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최근 세상을 떠난 일본(日本)작가 고미카와 준페이(五味川純平)는 전후(戰後)수십년간의 작품활동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침략전쟁을 고발해온 사람이었다.그의 작가적 재산은 태평양전쟁 말기 만주(滿洲)에서의 일본군 체험이었다.43년 징 집돼 소만(蘇滿)국경의 경비를 맡았던 그는 종전(終戰)직전인 45년8월13일 소속부대가 소련(蘇聯)군의 공격을 받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4명의 생존자중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50년대 후반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인간의 조건』이다.이 작품에서 그는 역사를 더럽힌 가해자로서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의 의미를 되묻는다.18권의 대하소설『전쟁과 인간』 역시 15년 전쟁의 전과정 을 치밀한 구성으로 전개하면서 전쟁의 발단이 얼마나 터무니없고,그 결과가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고발한다.
고미카와 뿐만 아니라 2차대전이나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일본작가들의 작품은 대개가 「있어서는 안될 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의 책임을 묻고 있다.전후세대의 추리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는 전쟁당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 는데 좀더 적극적이다.
엊그제 미국(美國)뉴욕 타임스紙가 『미국이 만주주둔 731부대의 「인체실험」을 은폐했다』는 보도를 했지만 그 내용도 이미10여년전 모리무라가 오랜 자료수집과 취재끝에 펴낸 다큐멘터리『마루타』에 들어있다.
「작가의 양심」에 따른 이같은 작업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권이나 사회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다.
침략전쟁을 미화하거나 군국주의를 부활하려는 낌새가 은연중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이런 가운데 태평양전쟁중 일본 왕이 도조 히테키(東條英機)前총리겸 육군참모총장의 전쟁수행을 칭찬하는 칙어(勅語)를 내린 사실이 밝혀졌다는 보도가 눈길을 끈다.종전당시일본 왕의 항복 메시지 가운데 『일본은 견디기 힘들고 참기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야만 한다』는 내 용이 들어있고,48년 전범(戰犯)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도조가 생전의 옥중기(獄中記)에서철두철미하게 전쟁도발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점으로 미뤄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단지 이것이 최근 일본 의회의 「사죄와 부전(不戰)결의」에 대한 반대론에 어떤 영향을 미칠는지 예의 주시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