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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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비내리는 나가사키 ○29 헤어지면서야 길남은 지상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인사나 하지.나 장길남이라고 해.』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여기서야 조센진이면 다 한 묶음,이름따위가 있은들 뭐에 쓰겠어.』 씁쓸하게 웃으면서 지상은 길남의손을 잡았었다.
『윤지상이라고 해.일본 성은 가네다라고 하고.』 그날,캄캄한땅굴 공사장 안에서 지상은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아내면서 다짐하고 있었다.미치코는 잊어야 한다.그래야 한다.그렇지 않고 나는 여기서 살아낼 수가 없다.내가 미치코로 해서 만났던 일본,그건 일본이 아니다.
처음 들어간 땅굴 공사장 안은 싸늘하게 기온이 내려가 있었다.땅속이라 오히려 섬뜩하게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그러나 일이 시작되면서 그 써늘했던 추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몸에서는 땀이 흘렀다.탄광에서,공사장에서 죽어간다던 징용공 들의 말이 성큼 다가와 살갗에 들어붙는 느낌이었다.그 속에서 그는 내내 미치코를 생각하고 있었다.얼마나 아름다웠던가.미치코는 말했었다. 『일본에는 이런 말이 내려온답니다.여자란,걸으면 백합이고,서면 작약이고,앉으면 모란꽃이 된다고 말이에요.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예쁘지가 못하답니다.』 그때 지상은 웃으며 말하지 않았던가. 『조선에서는 못생긴 여자를 보고 호박꽃도 꽃인가 하지요.』 『아 싫다.그건 너무 여자를 밉게 말하는 거예요.』 말까지도 닮아 있는 두 나라가 아니었던가.옛말들이 특히 그랬다.우리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을 그들은 염소 잃고 우리 고친다고 했었다.한쪽이 소이고 한쪽이 염소일 뿐 그 말에는 다른게 없었다.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도 마찬 가지였다.일본에서는이것을 강 건너려는데 배 있다고 말했었다.
땅굴 속에서 돌더미를 져 나르면서 지상은 내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 여자는 내가 사랑할 수도,마음에 품을 수도 없는 여자,일본 여자였구나.눈 속으로 흘러드는 땀 때문에 아려 오는 눈을 흙투성이의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그는 아 침에 돌팔매질을 하며 조선놈들을 욕하던 일본 아이들을 떠올렸고,각반을 차고 채찍을 든 일본 경비원을 생각했다.그때마다 그들과는 건너편에 서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미치코를 그 위에 겹쳐보려고 애썼다.그러나 그 둘은 어느 것도 지상 의 안에서 하나가 되지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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