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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과 펜 쥘 힘만 있어도 행복한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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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황명걸 시인(73·사진)은 은발만 아니라면 젊은 청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청바지와 점퍼 차림에 야구 모자까지 눌러쓰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황명걸 시화집, 그림과 함께 다시 읽는 천년의 시』(민음사)를 펴낸 그를 만났다. 시인은 2004년 전립선암을 선고받고 줄곧 항암치료를 받아왔다. 그런 그가 직접 그림까지 그려 시화집을 낸 것이다.

“암 투병을 해온 지난 4년 동안 시가 써지지 않아 깊은 회의에 빠졌어요. 화가 치밀기도 했지요. 그래서 내 시를 쓰기를 삼가고, 대신 다른 분이 쓴 좋은 시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때 제게 위안을 줬던 작품들을 시화와 함께 엮은 것입니다.”

1962년 등단한 시인은 작품을 다문다문 내놓기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묶어낸 시집도 세 권뿐이다.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지는 이번 책 속에 담긴 시화가 궁금해졌다. 부친의 반대로 미대 진학을 포기한 뒤에도 그림에 대한 미련을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그였다.

그는 “내게 그림은 끝내 붙들지 못한 애인이었는데 멀찍이 도망가는 그를 드디어 불러세웠다”고 말했다. 50편의 그림을 그리는 데 꼬박 1년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굳은 손을 쥐락펴락 단련해가며 붓을 쥐었다고 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고 말하는 그의 양볼이 청년처럼 붉어졌다.

이 책에는 고려시대 정지상부터 정지용·미당·윤동주·신경림·정호승·기형도까지 시인 43명의 작품 50편을 실었다. 소리꾼 장사익의 노랫말도 넣었다.

좋은 시란 어떤 것일까. 그는 “입에 붙고 가슴에 남아 두고두고 곱씹게 하는 시”라고 답했다. 이번 시화집에 담긴 작품들을 일러 “핏줄처럼 끌리는 시”라고도 했다.

시인은 동갑내기 아내와 단둘이 경기도 양평 남한강변에 산다. 그는 “아내 덕분에 힘든 병을 이겨내 가고 있다”며 “아직 매일 먹는 약이 한 줌이지만 이제는 괜찮다”라며 웃음을 보였다.

그는 책에 실린 시화와 후배 화가들의 찬조 작품을 곁들여 2월 중순쯤 인사동 공갤러리에서 시화전을 열 생각이다.

“이번 책이 제 생애 마지막 책이라는 각오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하고싶은 것은 이제 다 풀어냈습니다. 그래도 시와 그림은 평생 계속 할 겁니다. 붓과 펜을 쥘 힘만 있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하고 싶어요. 늘그막에 더 이상 행복할 수 있을까요?” 고희를 넘긴 그가 청년처럼 보이는 까닭을 알듯 했다.

글=이에스더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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