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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의 난 … "국제 밀값 통제 불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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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하광옥 이마트 상품본부장은 “설이 지나면 밀가루로 만든 PL 상품의 가격 인상을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PL(Private Label) 상품이란 소매업체가 제조회사에서 납품받은 물건에 자기 브랜드를 붙여 파는 걸 말한다. ‘착한 가격’을 내건 이마트의 PL 상품도 들썩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치솟고 있는 밀가루 가격 때문이다.

롯데제과는 최근 12개들이 드림파이를 2800원에서 3000원으로, 미니크런키는 1000원에서 1200원으로 올렸다. 31일에는 카스타드의 개수를 12개→11개로 줄인 제품을 내놓기로 했다. 가격은 지금(3600원)과 같다. 롯데는 200여 종의 과자 중 3분의 2 정도를 3월 말까지 차례로 10~20% 올리기로 했다. 농심도 라면값 인상률과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농심 관계자는 “지난해 3월 가격을 올려 참아왔는데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게 다 밀값 폭등 때문이다. 밀을 수입하는 박경용 CJ 제분원료파트 팀장은 “국제 밀값은 통제 불능의 상태”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t당 100달러 수준이던 것이 지난해 말에는 400달러를 넘었다.

◇밀가루 왜 난리인가=세계의 밀 생산량은 2년 연속 소비량을 밑돌았다. 올해도 같은 상황이 예상된다. 그 결과 2000년 연간 소비량의 35.5%였던 재고율이 지난해에는 17.9%로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 때문에 밀 생산이 크게 줄었다”고 말한다. 중국·인도의 고성장이 이어지면서 2000년 이후 두 나라에서만 밀 소비량이 20% 이상 증가한 것도 밀가루 부족을 부추긴 원인으로 지적된다.

국제시장에선 곡물 투기가 극성을 부리고, 농부들이 밀을 내놓지 않는 ‘파머홀딩(farmer holding)’도 나타나고 있다. 값이 더 오르길 기다리는 것이다. 곡물 생산국들은 식량포대의 끈을 조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베트남 등은 수출할당제를 실시하거나 신규 수출 계약을 금지하기로 했다. 중국은 올해 밀·콩·보리 등 57개 곡물에 5~25%의 수출세를 물리기로 했다. 박경용 팀장은 “국제 입찰에 밀을 내놓는 업체도 예년엔 7~8개 정도가 됐으나 요즘은 1~2개에 불과하다”며 “그에 따라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했다.

밀값이 언제 진정될지 예상하기도 힘들다. 세계식량기구(FAO)에 따르면 최근 기니·모리타니·멕시코 등 7개 국가에서 밀가루를 구하지 못해 식량폭동이 일어났다. 성명환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세계적인 식량파동을 걱정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대비책은 있나=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28%, 밀 자급률은 0.2%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그동안 국제 곡물가가 싸서 별다른 투자나 대비를 안 했다”고 지적했다. 유통구조도 문제다. 한국은 아처다이넬스미드랜드(ADM)·분게·카길·루이 드레퓌스(LDC) 등 미국·유럽계 메이저에서 현물로 수입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현지 직거래나 선물거래는 드물다. 세계 농산물 정보에 어둡고, 선물거래는 전문성이 필요해 대부분 업체가 도입하길 꺼린 탓이다.

농림부는 지난해 11월 곡물가격 대책반을 만들었다. 최근엔 김달중 차관보 주재로 업계와 학계 대표들을 모아 긴급회의를 열었다. 업계 대표들은 ▶곡물 수입선 다변화 ▶공동 장기구매 및 선물거래 활용 등 구매 방법의 다양화 ▶밀·옥수수에 대한 할당관세 인하 등을 요구했다.

해외에 농지를 개발해 생산거점을 마련하는 등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용택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본은 남미 농업이민자 네트워크를 활용해 브라질·아르헨티나 등에 거점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양선희·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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