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기행>"죽음와 구원" 마이클 벌리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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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인간이 합리만을 맹종할 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또 효율만을 고집할 때 얼마나 비인간적인 수렁에 빠지게 되는가.
올해는 해방 50주년.유럽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50주년이다.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한국인 생체실험 악몽이 아직 우리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 독일 아우슈비츠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기억하는 집회가 성대하게 열렸다.한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민족은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다는 인간의 무모함을 반성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나치의 대학살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치밀하게 추적한 책이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발간돼 충격을 주고 있다.제목은 『죽음과 구원』(원제 D-eath and Deliverance:Euthanasia in Ger many1900~1945.Cambridge Univ.
Press刊.3백82쪽.$18.95)으로 20세기 전반 독일사회를 지배했던 광기의 역사를 유대인 학살과는 또다른 시각에서낱낱이 폭로하고 있다.런던 경제대학(London S-ch ool of Economics)에서 국제사를 강의하고 있는 저자 마이클 벌리(Michael Burleigh)는 다수의 복지와 안녕을 구실로 힘없고 병든 자들을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하는 일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가 집중적으로 파고 드는 시기는 1930년대 후반과 40년대 초반.당시 독일의 가장 큰 골칫거리의 하나는 노동력을 상실한 일반병자들과 정신질환자의 처리문제였다.국가경제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사회가 부담 해야 하는 심적.물적 비용이 불합리하게 여겨졌던 것.특히 의료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
의사들은 1차세계대전 당시 야전병사들은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반면 중상을 입은 병사들은 병원침대에 누워 빵만 축낸다는 현실적 모순을 잊지않고 있었다.일부 학자들은 병자 한명이 평균 10년 정도를 더 산다고 가정할 때,7만명을 살해하 면 8억8천5백만 마르크의 금전적 이익이 남는다는 계산을 하기도 했다.이런 상황에서 의사들은 사회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고통없이 죽이는 「안락사」를 주저없이 행동에 옮기게 된다.그러나말이 안락사지 실제로는 고의적인 살인 행위와 다름 없었다.그들이 내세웠던 이론은 이른바 우생학.찰스 다윈의 「적자생존」원리에 따라 육체적.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들을 거세해야 사회가튼튼하고 건전해진다는 냉혹한 논리다.이같은 사회진화론은 19세기 후반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했지만 이를 현실에 적용,자국민까지 집단적으로 실험의 도마위에 올린 경우는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비록 빈궁했던 경제상황이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과학이라는사이비 가면을 쓰고 동족을 무참히 학살한 일은 결코 용납될 수없다는 것이 저자의 항변이다.
이런 식으로 희생된 환자들은 당시 독일 국민의 1%에 해당하는 40만명 정도.2차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독일의 6개 정신병동에서 약 20만명의 성인남녀와 아이들이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서 질식돼 숨졌고 나머지도 총살 혹은 독살,그 리고 굶어죽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한마디로 미친 사람이나 불구자들에게 돈과 음식을 제공하는 일은 오직 낭비에 불과하다는 의식이 팽배했다는 말이다.나치는 병자들의 끔찍하고 황량한 삶의 무용성을 홍보하기 위해 『나는 고발한다』라는 영화 를 제작하기도 했다.이영화는 동맥경화에 시달리는 아내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의사인 남편이 아내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다는 내용을 줄거리로 하고있다.집단살해극을 체계적으로 지휘한 사람은 바로 히틀러.1939년 관료들에게 환자들을 처단해도 좋다는 비밀명령을 내렸던 것. 저자는 20세기 전반 독일사회의 병적인 집단심리에 뚜렷한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망각될뻔 했던 당시상황을 재현하는데 1차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는 이책을 통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비틀어진 합리주의가 인간성 파 괴에 얼마나 기여하는 가를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朴正虎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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