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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스승들이 후학에게 쓰는 글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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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서울대의 ‘영원한 스승’들이 함께 책을 냈다.

정년퇴임 후 학문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이 대학 명예교수 57명이 후학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충고와 회고담을 모은 것이다. 김윤식(국문학)·정원식(교육학)·김용일(의학)·이현복(언어학)·신용하(사회학)·이광규(인류학)·박세희(수학)·이동녕(금속공학)…. 필자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최고에 이른 대가들이다.

책은 『끝나지 않은 강의』·『내 마음의 등불』·『다섯 수레의 책』등 세 권. 강의에 대한 회고와 조언, 인생에 가르침을 준 인물 소개, 감동을 준 책 이야기를 주제로 19명씩의 글을 묶었다.

필자들은 한결같이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10대 초반에 해방을 맞고, 곧이어 건국 초기의 사회적 혼란과 한국전쟁을 겪었다. 또 4.19혁명, 5.16 쿠데타,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등으로 소용돌이친 근대사의 참여자이자 목격자이다.

학문적으로는 선진국의 연구 성과와 방법론을 도입하고 각자의 뼈를 깎는 노력을 더해 한국 고등교육의 기틀을 잡은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오늘의 서울대를 있게 하고 최고의 지성을 일궈낸 분들"이라고 표현했다.

*** 서울대 출판부 첫 非학술서

책에서는 개척자로서의 이들의 경험과 인생이 그대로 묻어난다.

김용일 교수는 1960년대 초 교수진의 부족으로 의과대를 졸업한 지 1년 만에 한 대학에서 병리학을 강의하고, 유학 중인 대학에서 강의를 맡아 영어 발음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경험담을 소개했다.

이동녕 교수는 친구에게 350달러를 빌려 비행기삯을 내고 나머지 32달러만 달랑 들고 미국으로 떠난 과거를 돌아보며 유학 1세대의 체험을 전했다.

*** 57명의 에세이 3권 내놔

50, 6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의 향수를 자극할 만한 대목도 많다. '마로니에 정원에 둘러앉아 조국과 민족의 활로에 대해 열띤 논쟁과 토론을 벌였다. 그러다 지쳐 교문 앞 '별장'다방에 들르면 시내의 값비싼 음악실 '르네상스'나 '돌체'에서 틀어 주는 고전 명곡들이 신청하는 대로 나왔다.'(신용하 교수의 '김구 선생, 최문환 스승과 나의 '민족' 공부')

고(故) 김진균(사회학) 교수는 지난 14일 작고하기 3일 전 서울대출판부에 들러 손수 교정 본 원고를 전했다. 결국 이 책에 실린 글 '살아 숨쉬는 학문을 일구기 위해'는 유작이 됐다. 그는 "꿈이 모두 실현되지는 않는다. 또 꿈이 모두 옳았던 것도 아닐 것이다. …4.19기념탑을 볼 때마다, 그리고 80년대에 죽은 학생들의 추모비를 볼 때마다, 한반도를 지켜 온 조상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불안정한 삶에 내몰린 민중-노동자의 처절한 싸움을 볼 때마다, 이 시기에 내가 교수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는지 언제나 조심스럽게 반성하는 마음으로 지내왔다면 스스로 조그만 위안이 될는지!"라고 썼다.

필자들은 책에서 '영예로운 정년퇴임을 맞지 못하고 교단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노교수가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마는…'(정원식 전 국무총리) 등 각자 소회를 피력하고, 그동안 자신을 이끌어준 스승.가족.제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 김진균 교수는 遺作 실려

세 권의 책은 27일 출간된다. 61년에 설립된 서울대 출판부가 학술서적만 고집하던 전통을 깨고 이례적으로 에세이 모음 형식의 책을 낸 것이다. 출판부 관계자는 "더 늦기 전에 큰 스승들의 지혜를 전수받기 위해 40여년 동안 지켜온 금기를 기쁜 마음으로 어겼다"고 말했다.

이상언.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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