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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수에 맞설 ‘진보의 진보’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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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진보 진영의 고뇌가 깊어만 간다. 단순한 대선 후유증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갈지에 대한 진보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된 보다 근원적 고민이다. “이명박 당선인의 BBK 의혹이 대선 전에 사실로 밝혀졌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란 자조까지 나온다. 4월 총선의 참패가 불보듯 뻔하다는 예단도 제기된다.

 진보 학계가 돌파구를 찾기위한 본격 토론회를 처음으로 마련했다. ‘대선 이후 진보개혁세력 어디로 갈 것인가’. 18일 오후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세교연구소(이사장 최원식)에서 열린 ‘세교포럼’의 주제다. 세교연구소는 진보 성향 잡지 ‘창작과비평’(편집인 백낙청)의 부설 싱크탱크로 2006년 문을 열었다. 이날 포럼엔 김호기(연세대)·조희연(성공회대) 두 교수가 발제를 했고, 김종엽(한신대)·서동만(상지대)·조효제(성공회대)·최태욱(한림대)·김명환(서울대)·이남주(세교연구소장, 성공회대) 교수 등이 토론에 참여했다.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는 누구나 공감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 지에 대해선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87년 민주화 이래 최대 위기에 처한 진보 진영의 현주소다.

 ◇진보의 진보가 필요하다=진보 학계의 대표적 중견 학자인 조희연 교수는 이명박 정권의 등장을 ‘보수의 진화(進化) 혹은 진보’라는 관점에서 파악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보수의 진보에 대응할 ‘진보의 진보’가 필요한 때라고 진단했다. 진보의 진보를 위해 자신은 담론계에서 은퇴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변화가 절실하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신보수 진영이 내놓은 선진화론에 대한 진보의 설득력이 있는 대항 담론이 없었음을 인정했다.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경쟁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못했음도 반성했다. 이어 다가올 총선에서 진보 진영의 대패가 예견된다 하더라도, 국민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한 교두보를 쌓는 심정으로 대처하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 교수는 보수 진영과의 전선을 ‘신(新)성장연합 vs 신(新)평등연합’ 구도로 할 것을 제안했다. 국가보안법·사립학교법 같은 정치적 개혁 의제에서 비정규직 법안 마련 등 민생과 직결된 사회경제적 의제로 관심을 바꿔야한다는 지적을 덧붙였다.

 ◇민주화 시대의 종언=2년 전부터 뉴레프트(신진보)의 필요성을 제기해 온 김호기 교수는 이번 대선에 대해 “민주화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97년 외환위기와 연관된 세계화시대가 본격 개막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고용없는 성장의 가시화’‘국제자본의 영향력 강화’‘비정규직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의 증가’‘저출산·고령화·청년실업의 이슈화’‘세계주의와 민족주의 경향의 동시적 증대’ 등이 세계화의 뚜렷한 징후며, 이에 대한 효과적 대응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이어 진보 쪽의 문제는 결국 세계화 시대의 이슈를 여전히 민주화 시대의 방식으로 풀려는 데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세계화와 대외 개방에 대한 진보쪽의 사고 전환을 요청했다. 대외 개방의 이익을 대내 복지의 투자로 선순환시키는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보수세력과의 전선을 ‘민주화 vs 선진화’ 가 아니라 ‘양극화적 세계화 vs 통합적 세계화’ 구도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포럼의 분위기는 전망 불투명에 대한 우려와 대안 부재에 대한 고뇌가 압도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섣부른 결론을 내려는 이는 없었다. 토론을 맡은 김종엽 교수는 “진보의 이미지가 중요한데, 보수 진영이 선진국을 만들자고 구체적으로 나오는 반면 진보쪽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 지가 뚜렷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조효제 교수는 “진보 쪽이 왜 졌는지를 더 많이 얘기해야 할 때”라고 했다. 12월 19일 대선 당일에 졌는지, 그 전부터 졌는지, 언제부터 변곡점이 시작됐는지를 더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남주 교수는 “사회 정의와 연대에 대한 진보적 감수성을 어떻게 대중의 삶의 향상과 직결시키는 가하는 것이 결국 중요하다”며 “세교포럼의 올해 주제는 진보의 대안을 찾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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