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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67. 깨어진 원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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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광복 60주년 기념 문화사업의 하나인 ‘겨레문화 창의단’ 발대식 모습.

남이 해도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이 원칙 때문에 거절한 자리가 꽤 있다.

 1985년께 당시 공보부의 기획관리실장이었던 김동호씨가 나를 찾았다. 그는 고등학교 후배라 평소 친분이 있던 터였다. 집무실에 찾아갔더니 그가 입을 뗐다. “한만영(1935~2007) 국립국악원 원장이 임기를 끝내면서 황 선배를 후임으로 천거했습니다.” “나는 절대로 못합니다. 지금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지만 나는 단체장이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나는 바로 그해 말 미국 하버드대에 객원교수로 갈 예정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단번에 거절했지만 그 또한 고집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 번만 다시 생각을 해주세요. 선배님 뜻을 펼치기에 좋은 자리 아닙니까.” 김동호씨에 이어 한만영 선생도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전임 원장으로서 뿐 아니라 개인적인 부탁까지 겹쳐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번 결정하고 나서 마음을 바꾸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10년이 넘게 흐른 90년대 말, 주돈식 당시 문화부 장관이 나를 찾았다. 대통령 비서실 출신으로 당시 힘이 막강했던 장관이었다.

그도 나에게 국악원장 자리를 맡기려고 했다. “저는 직업을 가야금 연주자 및 작곡가로 정했습니다. 이 일만 하면 되고 그 외의 일은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또 강력히 거절했고 결국 이성천씨가 국악원장이 됐다. 이렇게 두 번의 국립국악원장 자리를 거절한 것이다.

 하지만 70년을 살다 보니 사람의 원칙은 깨지기도 한다. 2005년에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나라에서 문화사업을 많이 벌였고 나에게 추진위원장 자리를 맡겼다. 국악원장 제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거절했다. 그런데 3월 어느 날 문광부의 정동채 장관이 “아무튼 점심이라도 한 끼 같이 하자”고 했다.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서울 가회동 한정식집에 갔다. 한데 정 장관이 이미 위촉장을 만들어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정성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위촉장이라는 것이 종이에 글씨를 쓴 게 아니라 천에 실로 수를 놓은 것이었다. 까만 천에 오색으로 수를 놓고 추진위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새겨서 액자에 넣은 것이다. 재미있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추진위원장 자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정치권에서도 ‘콜’ 비슷한 것을 받은 일이 있지만 일축해버렸다. 그 쪽에서는 조금 섭섭했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살면서 나도 봉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되도록이면 연주와 작곡으로 할 일을 하려고 한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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