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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법률 시장도 여는 게 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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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진통 끝에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이 국회를 통과했다. 농민의 고충을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나 국민경제 전체의 이익을 고려할 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국제경쟁력이 농업보다 못한 분야가 한둘이 아닌데 유독 저소득층 비중이 높은 농업이 먼저 개방된 것을 보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개방의 충격을 통해서라도 개혁을 서둘러야 할 분야를 꼽자면 교육.법률.보건의료.영화.방송광고 시장 등 농업보다 앞서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 개방의 충격 통해서라도 개혁을

지난해만 해도 2만명이 넘는 중.고교생이 조기유학과 교육이민을 떠났고 교육수지 적자는 18억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하향 평준화된 국내 교육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수치로, 농축산물 시장 전체 적자액인 66억달러와 비교해도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소득수준이 낮아 유학은 꿈도 못 꾸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교육의 질이 개선되지 않는 한 부유층 학생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교육수지 적자는 외화 유출 이상의 문제점이 있다. 조기유학 붐이 부의 세습을 공고화하기 때문이다. 여유있는 가정일수록 자녀의 일류대학 입학이 어려워지면 일찍 유학을 결정한다. 문제는 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 인생이 역전돼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 교육의 질이 엉망이다 보니 그간 허송세월한 국내파에 비해 외국어라도 할 줄 아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크기 때문이다. 중산층을 위한다는 신념 하에 교육평준화를 신성시해오는 동안 유학을 보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만 유리해진 셈이다.

사정이 이 지경이니 차라리 해외 유수 학교를 국내에 유치, 외화도 절약하고 국내 교육의 자극제 역할을 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국적있는 교육을 핑계로 교육시장 개방을 막는 것은 이해집단의 밥그릇 챙기기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계 학교라고 국내 교사를 고용하여 국어.국사를 못 가르칠 리 없다. 어린아이들을 외국에 내보내는 것보다 외국계 학교라도 부모 밑에서 다니게 하는 편이 국적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평준화 틀을 개선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해갈등과 이념논쟁 속에 결실이 없으니, 오죽 답답했으면 개방의 충격을 통해서라도 탈출구를 마련하자는 주장이 나올까.

법률시장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경제활동의 국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외국 법률에 대한 자문 수요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법률시장이 개방되지 않아 국내 기업이 외국 변호사에게 자문하려면 해외로 나가야 한다. 또는 국내 법률회사가 외국계 변호사를 고용해 업무를 대행시키기 다반사다. 규제를 이용한 라이선스 장사인데 그 비용은 결국 기업의 부담으로 전가된다. 이를 개선하려고 외국계 법률회사의 국내 설립을 허용하는 안이 도하협상 양허안에 포함되었지만 국내 법조계의 반대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외국계가 국내로 진입하면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법률서비스 본연의 취지에서 벗어나 마케팅이나 광고 등 지나친 상업화로 치닫게 될 것이며, 소수의 국내 변호사를 고용한 뒤 국제법뿐만 아니라 국내법 관련 업무도 편법적으로 수행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 국제법 자문 서비스 크게 뒤져

그러나 개방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법률 서비스가 그간 상업화를 멀리하고 사회정의 구현에 노력해 왔는지 반문하고 싶다. 외국어 실력 부족으로 국제법에 관해 경쟁력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지만, 자국법 업무도 외국계 변호사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든 육법전서만 달달 외우게 만드는 사법고시 체계를 경쟁력을 갖춘 로스쿨 제도로 전환하자는 개혁 시도를 법조계 스스로 좌절시킨 데서 근본원인을 찾아야할 것이다.

농산물 개방에 이어 또 다른 시장 개방을 언급한 것은 자유무역에 대해 맹목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저소득층인 농민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농업개방을 허용한 이상, 농민보다 사정이 좋으면서 자체 개혁에 소극적으로 일관해온 이해집단을 보호해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창용 서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