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화재 생존자들 ‘악몽’의 나날 “눈 감으면 뻘건 불길이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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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수 직원들이 10일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코리아2000 냉동창고 화재현장에서 정확한 발화 장소와 원인을 찾기 위해 냉동실 주변을 조사하고 있다. [이천=연합뉴스]

 10일 낮 서울 강남구 강남베스티안 병원 7층 중환자실. 이천 냉동창고 화재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박종영(35)씨가 얼굴과 몸통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다. 그는 화상의 고통이 심해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있다. 그러나 박씨를 괴롭히는 것은 몸에 난 상처만이 아니다.

 “하루가 너무 길어요. 눈을 감아도 불길이 자꾸 쫓아오는 것 같고, 어딘가에서 자꾸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박씨는 창고 안에서 불길을 보고도 곁에 있던 동료를 구하지 못한 채 혼자만 살아나왔다는 자책감이 든다고 했다. 그는 “동료들 얼굴이 꿈에 떠오를 것 같아 잠잘 수가 없다”고 말했다.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안순식(51)씨도 비슷한 고통을 호소했다. 안씨는 사고 당일 냉동창고 중간에서 보온배관 작업을 하다 몸이 불길 쪽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출입구 쪽으로 필사적으로 달려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는 “원래 업어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잠을 잘 잤는데 사고 이후론 악몽을 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눈을 감으면 불길이 ‘샥’하고 나를 덮치는 모습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안씨는 “자꾸 식은땀이 나고 누가 주위에 있는지 나도 모르게 둘러보게 된다”고 덧붙였다. 안씨도 “같이 밥 먹고 농도 주고받던 사이인데…”라며 숨진 동료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천 냉동창고 화재 생존자들이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불면증을 호소하거나 화재 당시의 기억이 되풀이돼 몹시 불안해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화재나 재난 등 대형 사고 피해자에게서 나타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초기 증상인 것이다.

 이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것은 부상자만이 아니다. 사고 당시 공장 출입구에서 전기 작업을 하다 별다른 부상 없이 빠져나온 이대희(25)씨는 “주변에서는 살아나 다행이라고 위로하지만 길거리를 지나가다 음식점의 화로만 봐도 손바닥에 땀이 난다”고 토로했다.

 탈출 당시 폭발로 인한 거센 바람을 맞았던 이찬재(43)씨도 “바람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놀라고 머리가 계속 아프다”고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이런 증상을 해소해주지 않을 경우 생존자들이 사회생활에 지장 받을 수 있고 본인은 물론 가족에까지 마음의 병을 남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정범 계명대 교수(정신과)는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사건의 생존자 가운데는 수년이 지나도록 지하철을 못 타거나 구워먹는 음식조차 싫어하는 이가 많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주위 사람들이 환자가 겪은 일에 대해 잘 들어주고, 그 사람에게만 닥친 불행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선 대형 참사 피해자들을 상대로 정신치료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2001년 뉴욕에서 발생한 아메리칸항공 여객기 추락사고 때는 피해자들을 위한 정신상담팀이 꾸려져 생존자와 유가족을 도왔다.

 PTSD 전문가인 조용범씨는 “9·11 테러 때도 정신과 의사 수백 명이 자원봉사팀을 꾸려 사고 현장 주변에 천막을 치고 생존자와 목격자에 대한 치료에 나섰다”고 소개했다.  

한은화 기자

◆외상(外傷)후 스트레스 장애(PTSD :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화재·전쟁·붕괴 사고 등 생명을 위협받는 심각한 상황을 경험한 뒤 나타나는 증상. 불면·과민 반응 같은 증세가 생기며 심할 경우 사회적 복귀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사고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이 같은 증상이 지속되고 사회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있을 때 진단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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