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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명승부 영화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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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34세의 노장급 여자 핸드볼 선수 미숙(문소리)은 실업대회에서 우승하던 날, 소속 팀의 해체 소식을 듣는다. 영화 속의 시간으로 4년 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주역이건만 비인기 종목의 현실은 서글프다. 설상가상으로 선수 출신인 남편(박원상)은 사업에 실패하고 빚 독촉을 피해 도망 다니는 처지다. 어린 아들과 먹고살기 위해 미숙은 대형 마트의 판매원으로 나선다.

미숙에 비하면 옛 동료 혜경(김정은)은 언뜻 형편이 나아 보인다. 일본 실업팀에서 활동하다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의 신임 감독대행으로 부임했다. 전력 강화를 위해 혜경은 왕년의 경쟁심을 접고, 미숙을 설득해 국가대표팀에 합류시킨다.

하지만 감독 노릇은 잠시일 뿐. 혜경의 지도방식은 어린 선수들과 불화를 빚고, 새로 합류한 노장 선수들과 신진 선수들 사이에 몸싸움까지 벌어진다. 혜경은 감독 자리에서 밀려난다. 이 와중에 협회 관계자가 혜경의 이혼경력을 들먹이는 것도, 새 감독이 과거 애인이었던 승필(엄태웅)인 것도 자존심 상하는 대목이다. 번민 끝에 혜경은 선수로 백의종군하게 된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뚝심 있는 감동의 드라마다. 흔히 스포츠 명승부를 가리켜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 대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명승부를 펼쳤던 여자 핸드볼팀의 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당시 팀의 주축은 서른 전후의 노장 기혼 선수들. 속칭 ‘아줌마 부대’로 불렸다.

실제 선수와 같은 혹독한 훈련을 받은 세 배우. 왼쪽부터 남편의 사업 실패에 소속팀 해체라는 이중고를 겪는 미숙(문소리), 감독대행으로 부임했다 선수로 백의종군하게 된 혜경(김정은), 닭살스러운 금실을 자랑하면서도 아기를 갖지 못해 괴로워하는 정란(김지영).

영화의 상상력이 주로 살을 붙인 대목이 여기다. 주인공들은 핸드볼이라는 비인기 종목의 선수이자, 아줌마로 요약되는 고단한 일상의 짐을 진 생활인이다. 쉽지 않은 스포츠 경기를 소재를 택한 이 영화의 뚝심은 코트 밖에서 벌어지는 인생의 경기에 먼저 초점을 맞추는 영화적 각색을 더해 진한 감동의 인생 드라마를 빚어낸다.

메가폰을 잡은 임순례 감독은 세련된 기교를 자랑하는 대신 투박하다 싶을 만큼 정직하게 캐릭터와 갈등을 차근차근 구축해 나간다. 주변부 인생에 대한 그의 애정은 전작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이미 확인된 바다. 이번 영화에서는 웃음과 눈물의 폭발점을 번갈아 제대로 자극하는 한결 대중적인 연출력을 보여준다.

이 웃음의 상당 부분은 팀에 합류한 또 다른 아줌마 선수 정란(김지영)과 대체할 선수가 없어 여전히 대표팀을 지키는 노처녀 골키퍼 수희(조은지)의 공이다. 특히 뽀글 파마에 억센 사투리를 내세운 정란은 막무가내 푼수인 듯하면서도, 남자들에 맞먹는 걸걸한 성품으로 후배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에 그려지는 여성성은 흔히 말하는 ‘자매애’(sisterhood)보다 ‘아줌마성(性)’ 혹은 ‘아줌마다움’이 더 적확해 보인다. ‘아줌마’라는 단어에 비하적인 어감이 있기는 하되, 영화가 부각시키는 것은 그 장점이다. 예쁜 척, 공주인 척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여건의 이들 노장 선수 4인방은 때로는 민망함을 감수하며 세상을 향해 팔을 걷어붙인다.

동시에 타자를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배려하면서 갈등의 골을 채워 나간다. 이 독특한 연대감의 세계에서는 남자들 역시 악인이 아니다. 과학적·합리적 지도방식을 내세우며 노장 선수들과 갈등을 겪던 신임 감독 승필도 제자리를 찾아간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힘은 연기의 앙상블이다. 문소리·김정은을 주축으로 김지영·조은지·엄태웅 등이 캐릭터에 맞는 제 몫을 보여준다. “핸드볼은 단체경기”라는 영화 속 대사 그대로다.

본격적인 경기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집중돼있다. 할리우드 스포츠 영화에 견주면, 경기 장면 자체의 박진감이 최상급은 아니다. 그럼에도 앞에 펼쳐놓은 이야기의 단단한 힘이 결승전의 명승부와 순탄하게 연결된다. 이 경기 장면이 주는 감동의 큰 몫은 무엇보다 실화의 힘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강적 덴마크와 맞서 연장전에다 승부던지기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던 경기의 진행상황이 재현된다.

누가 2등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잔혹한 말을 남겼을까. 메달의 색깔에 상관없이 진정한 명승부를 펼쳤던 그 선수들의 투혼을 이 영화는 스크린 위에 다시 불러낸다.

주목!이장면영화 맨 마지막, 당시 경기의 실제 주역들이 등장한다. 선수들에 이어, 카메라 앞에 선 감독은 끝내 하려던 말을 맺지 못하고 허공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 말줄임표의 표정이야말로, 백 마디 말보다 훨씬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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