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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작문제작가>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샐러리맨은 회사가기 싫다.왜 피곤하니까.그래도 그는 드링크 한병을 마시고 회사로 간다.
90년대 샐러리맨의 속내를 가장 직설적으로 드러낸 이 광고는후기 산업사회 중산층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끊임없이 앞만보고 달려가는 현대문명.거기에 몸을 실은 개인들은 어느날 사막같은 불모의 땅에 버려진다.뒤돌아 보면 떠나온 곳이 아득하다.
지난해 가장 주목받는 신예작가로 떠오른 윤대녕의 소설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현대문명의 그늘에 대한 자각과 대안없음.이 당혹스런 풍경은 거대서사가 사라지고 중심이 공동화되어가는 90년대의 현실이다.
윤씨는 90년 등단 이후 줄곧 이 처치곤란의 현실과 정면으로마주섰다.「시대가 가니까 나도 간다」는 식으로 서둘러 투항하지도,변화의 속도에 질려 과거에 주저앉아버리지도 않았다.그는 고속으로 달려가는 현실을 부단히 쫓아가면서도 거기 에 매몰되지 않고 숨가쁜 싸움을 벌여온 것이다.
그 싸움의 전략은 영화.팝송.록카페등으로 대변되는 90년대적공간과 시원회귀(始源回歸)라는 진지한 주제의 교합이다.첫 창작집 『은어낚시통신』의 수록작 대부분에는 현대문명에 중독돼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그 일상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소 시민들이 등장한다.이들이 생활의 닻을 찾기 위해 잃어버린 꿈을 찾아 떠나는과거로의 여행이 시원회귀다.
그러나 이들은 문명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회귀를 통해 고작 도달한 공간이 비밀모임인 은어낚시통신 클럽의 퇴폐적인 카페다. 윤씨의 소설에서 카페는 흔히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 설정되는 자궁에 현대인의 물질적 욕망이 겹쳐지는 공간이다.현대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시원회귀를 하는 과정에도 영상과 재즈와 성(性)을 가져가야 하는 90년대의 자가당착을 담아내는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그릇이 있을까.
지난주 기대속에 출간된 첫 장편『옛날 영화를 보러갔다』(中央日報社刊)는 전체적인 구도에서『은어낚시통신』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한층 소설읽는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이 소설은 추리와 시나리오 기법을 도입하고 영화.팝송.시.과학지식등 다양한 문화상품을 적절히 용해시켜 영상시대의 독자취향을 충족시키면서도 작품전체에 흐르는 밀도높은 시적 이미지들로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주인공인 「나」는 고속승진을 한 대기업의 중견사원으로 같은 회사 상무의 딸과 결혼하지만 실패하고 잡지사기자를 거쳐 번역일을 하고 있다.현실에 점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어느날 레코드 가게에서 주인여자를 보고 어디선가 본듯한 착각에 빠진다.그 이후 「나」는 단절된 기억의 한 부분을 회복하고 싶은 충동에 빠져든다.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회귀의 장소에는 한 소녀의 죽음이있다. 그녀는 치과의사인 어머니가 「나」의 친구인 희배아버지와관계를 가진 것을 목격한 이후 회귀를 꿈꾸며 자살한다.병약했던희배는 유진의 죽음에 큰 상처를 받고 과거의 기억속에서 살아가며 「나」의 뒤를 쫓아 소년기로의 회귀를 유도하는 일을 벌인다.결국 「나」는 희배를 만나 기억을 되찾고 유진을 닮은 레코드가게 여주인 선주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로 다짐한다.
『옛날 영화를…』는 『은어낚시통신』과 결말부분에서 큰 차이를보인다.「은어」「은어낚시통신」등의 작품은 구체적인 시원의 지점을 찾지 못하고 시원회귀의 지향으로 끝을 맺는 반면 『옛날 영화를…』는 시원회귀를 통해 기억을 되찾은 화자가 충일한 삶의 의지를 회복하고 다시 자신의 현실을 수용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부터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련다.살아가며 느끼게 마련인 견딜 수 없는 고통,용서되지 않는 시간,이 추운 겨울의막막함,혼자라는 두려움,혹은 서툰 사랑 하나까지도.이 모든 것을 뜨겁게 가슴에 끌어 안고 살아가야지.』 이 마지막 부분의 화자의 독백은 이제 시원회귀의 세계에서 벗어나겠다는 윤씨 자신의 선언이기도 하다.윤씨는 『등단이후 줄곧 과거의 기억을 빌려천착해온 시원으로의 회귀가 나를 1인칭 화자에 붙들어 두었다』면서 『이제 그 기억에서 벗 어나 좀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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