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어느 날 애인들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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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어느 날 애인들은’-허수경(1964~ )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우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 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오래 서가에 꽂아둔 낡은 책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썼던 편지를 발견한 적이 있다. 마치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아리다. 가슴에 묻어둔 사랑의 밀어를 나이가 들어 바라보면 기억조차 희미해져 제 별자리로 되돌아간 듯하다. 아마도 어느 누군가도 나에게 그런 편지를 썼으리라. 흐릿한 시간의 별자리에서 천천히 돌고 있는, 어린 무잎처럼 아린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부치지 못한 편지들….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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