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아이

부시와 이명박 만남에 바라는 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2005년 6월 노 대통령이 다시 워싱턴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당시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노 대통령이 북한을 싸고돌고 한·미동맹은 자꾸 약화시키고 있다”며 “우린 그를 눌러 버려야 한다(Let’s beat him up)”고 주장하자 부시 대통령은 “그러면 안 된다. 그는 나의 친구다”고 말렸다고 한다. 회담장에서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배석한 럼즈펠드 장관을 가리키며 “이 사람보다 내가 북핵 문제를 더 잘 안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이어 “그리고 나보다 이 사람이 북핵을 더 잘 안다”며 함께 배석한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현 국무장관)을 가리켰다. 강경파 럼즈펠드의 대북정책 개입 가능성을 걱정해온 노 대통령의 속마음을 읽고 “북핵에 관한 한 나와 라이스가 책임자”라고 안심시켜준 부시의 배려였다.

이런 관계는 그해 11월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백악관 관계자는 전했다. 노 대통령이 “미국이 진정으로 북한과 협상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따지듯 물었고, 부시 대통령은 기분이 상했다는 것이다. 미 재무부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자금 2500만 달러를 동결해 버려 달포 전 성사된 9·19 북핵 베이징 합의가 수렁에 빠져들던 시점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그렇지 않다”고 설득해도 노 대통령은 의심을 풀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고 관계자는 밝혔다. 그 뒤로 두 정상은 전 같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지난해 9월 시드니 APEC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놓고 두 정상 간에 벌어진 실랑이도 그 연속선상에 있다.

따지고 보면 정책으로 현실화된 노 대통령의 대미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은 보수 정권도 쉽게 밀어붙이기 힘든 결단이었다. 그러나 늘 ‘입’이 문제였다. 백악관 관계자는 “청와대 인사가 ‘미국이 북한을 폭격할까 봐 잠이 안 온다’고 말하고 다닌 것을 듣고 미국은 충격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뒤틀린 미국관에다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반미적 수사(修辭)를 연발하는 바람에 미국에 좋은 일을 해놓고서도 걸맞은 대접을 못 받았다는 얘기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이르면 3월 워싱턴을 찾아 부시 대통령을 만날 계획으로 알려졌다. 두 정상은 노 대통령이 한·미관계에 남긴 긍정적 유산은 극대화하고, 상처는 도려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당선자가 보수 성향이긴 해도 한·미관계가 형님·아우 식의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음을 워싱턴도 알고 있다. 이 당선자는 한국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고, 미국에 요구할 건 요구하되 미국이 동맹국에 가장 중요히 여기는 신뢰 회복에 힘써야 한다. 부시 대통령도 북핵 문제에 한국의 굳건한 공조를 요청하면서도 한국의 높아진 위상과 북한과의 특수관계를 인정해 상응하는 대접을 해야 한다. 양국 의회에서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한·미 FTA가 속히 통과되도록 힘을 합치는 것도 두 정상의 급선무다.

강찬호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