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테러의 악순환에 빠진 파키스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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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총리를 지낸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그제 폭탄 테러로 영욕(榮辱)의 생을 유혈로 마감했다. 유세를 마치고 나오던 도중 총격에 이은 폭탄 테러로 지지자 20여 명과 함께 목숨을 잃은 것이다. 비열한 테러로 인명을 앗아간 만행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충격에 빠진 파키스탄 국민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부토의 죽음은 개인과 가문의 비극만이 아니라 파키스탄 60년 역사의 비극이다. 폭력적 소요 사태가 파키스탄 전역으로 번지면서 당장 내년 1월 8일로 예정된 총선 등 민주화 일정의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비상사태 카드를 다시 빼어 들 가능성도 있다. 이번 사태는 ‘테러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세계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슬람권 유일의 핵보유국인 파키스탄이 극도의 정정 불안에 휩싸일 경우 45기로 추정되는 핵무기의 통제권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만의 하나 핵무기가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손에 넘어간다면 세계는 ‘핵 테러’라는 전대미문의 공포에 떨게 될 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번 테러의 진상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친(親)정부세력, 이슬람 과격세력, 알카에다, 정보계통, 군부 등 배후로 지목될 수 있는 세력이 너무나 많다. 수사가 미궁에 빠지면서 대립과 혼란이 극에 달할 경우 ‘테러와의 전쟁’의 또 다른 전선인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접경 산악지대에 은신해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이 활동을 재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對)테러전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무샤라프를 지지하고 있는 미국은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딜레마에 처해 있다. 독재자와 손을 잡은 미국에 대한 파키스탄 국민의 반감이 테러를 부추기고, 그럴수록 무샤라프는 더욱 철권을 휘두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소프트 파워보다 하드 파워를 앞세워 무리하게 대테러전을 밀어붙인 결과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미국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