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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의 기적' 가능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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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년여 전에 시작된 북한의 경제개혁 조치는 배급제도를 폐지하고 임금과 가격현실화를 통한 시장경제를 제한적이나마 시도해 왔다. 전국의 식량배급소가 식량판매소로 간판이 바뀌었고 평양의 통일로를 비롯해 전국에 생필품 시장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임금은 평균 18배 오른 반면 버스.철도요금은 20배, 쌀.옥수수.고기 가격은 3백~5백배 상승하는 등 일반 주민들의 생활고는 더욱 심각해졌다. 북한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 때문에 가격 현실화가 공급의 증가를 유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북한 고위층의 개혁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더 악화된 주이유는 개혁방향에 대한 현실적인 청사진이 제대로 설정되지 않아서다. 경제개혁 발표 후 필자가 북미 한인대학교수협회 회장단과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고위층에게 경제개혁의 모델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당당하게 '우리식'으로 하는 개혁모델이라고 대답했다. 2천만 주민들을 상대로 '우리식'개혁을 한다면 북한 지도층의 자존심은 흡족하겠지만 시행착오의 대가가 너무도 클 것이다. 북한이 박정희식 경제발전 모델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정황들도 있다.

朴대통령은 외국인 투자를 기피하고 그 대신 강력한 정부관료와 국내기업인들을 연대시켜 해외차관을 도입해 공장을 짓고 미국 등 해외시장에 수출함으로써 필요한 기술과 자본을 충당했다. 이러한 신중상(新重商)주의적 개발전략은 한국의 전략적 위치를 이용할 수 있었던 1960~70년대의 세계 냉전체제 속에서는 가능했으나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세계무역기구(WTO)와 자유무역협정(FTA)이 지배하는 21세기 개방경제 시대에는 불가능하다.

지금의 북한에는 오히려 중국식 개혁모델이 적합하다. 지난 20여년간 중국 경제의 경이적인 발전은 옛 소련 및 동구 국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시장경제를 도입해 경제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줬다. 중국은 개혁의 첫 단계로 아시아개발은행과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로부터 저리.장기차관으로 전력.철도.항만 등 경제인프라를 현대화시켰다. 세계은행 등은 국내 정치체제에는 관여하지 않고 경제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사업들에 과감히 투자를 승인해 주는 게 특이하다.

이처럼 중요한 인프라를 먼저 구축하고 국제기구들의 활발한 차관 공여로 해외 민간투자가들의 불안감을 해소한 중국은 싱가포르처럼 과감히 해외 직접투자를 받아들였다. 60년대 초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싱가포르는 취약한 국가안보와 황폐한 경제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그 당시 후진국들이 금기시해온 해외직접투자를 과감히 환영했다.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는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석유 등 자연자원 착취를 목적으로 한 식민지형 해외투자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진국들의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해 국제경쟁력을 올리려는 다국적회사들의 해외투자로 변경되면서 양쪽이 서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새로운 경제현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싱가포르의 이러한 성공전략에 영향을 받은 중국도 해외 직접투자를 적극 환영했으며 이에 호응해 먼저 홍콩.싱가포르.태국 등 동남아 화교기업들이 중국에 투자를 시작했다. 화교자본 유입으로 중국 경제개방이 현실화되자 곧이어 일본.미국.유럽 회사들까지 중국에 활발히 투자해 오늘날의 중국 경제 기적을 낳았다.

북한에도 중국식 개방모델이 21세기 초에 가장 적합하다 하겠다. 이를 위해 북한은 첫째, 아시아개발은행과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 가입해 전력.철도.항만 등 기반산업을 현대화해야 한다. 물론 이들 국제기구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북핵 문제가 원만히 해결돼야 하는 전제가 있다.

둘째, 중국의 화교자본 대신 남한의 재벌기업 등 민간자본들이 국제기구들의 북한 투자에 고무돼 노조의 불법파업이 없는 북한에 투자를 시작할 것이다. 셋째, 이처럼 북한 경제가 국제기구와 한국 기업들의 투자로 경쟁력을 높여가면 일본.유럽.미국의 기업들도 중국시장과 시베리아 자원개발의 전초지로 삼기 위해 북한에 투자할 것이다.

지금 세계의 이목은 북핵 문제와 식략부족 등 절박한 현실문제들에만 집착해 있으나 만일 북한 지도층이 현명하고 실질적인 개혁 모델을 택한다면 한강의 기적에 못지않을 '대동강의 기적'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박윤식 미 조지워싱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