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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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그리고,산 자도 말이 없었다(31) 천천히 걸어서 화순은 방파제를 내려왔다.술취한 나카무라는 경비원 막사에 가서 잠이 들겠지.방파제 밑을 걸으면서 화순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거라,길남아.가서… 살아서 땅을 밟거라.난 저쪽 섬 화장장에서 길자처럼 불에 타 죽어도 좋다.별일은 없었을 거야.네 놈하나는 내가 꽉 잡고 있는다 하면서 나카무라가 경비를 서지는 못하게 했으니까.육지 쪽을 지키는 경비원 놈이 내 무릎에 있었는데,내 엉덩이 주물럭대며 있었는데 무슨 일이야 있었겠니.마음놓고 헤엄쳐 건너갔어야 한다.
그런데,그런데 지금 내가 왜 울고 있는가.
화순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찝찔하게 입술을 타고 입안으로 흘러들었다.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그녀는 걸었다.한밤에는 갈매기도 잠을 자는가.이럴 때 잠 못이루는 갈매기라도 하나있어서 끼룩끼룩 날아 주었으면 동무라도 되련만.
화순은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덜렁덜렁 그녀의 옷깃에 떨어졌다.
어두컴컴한 밤길이어서 화순은 내팽개쳐진 낡은 목재 더미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훌쩍훌쩍 코를 들이마셨다.
나 내일부터 술 마실 거다.네가 잡혀오지 않는 그날까지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게 확실해질 때 까지는 나 술로 세월을 벗삼아 살거다.그래서 어느날 이제 네가 멀리 피했다는 걸 알게 될때 그때부터는 널 잊을 거야.잊을 수 있을거야.
그래야만 내가 사니까.널 잊지 못하고 난 이제 살아갈 수 없는 여자가 되었으니까.
이건 행복이란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찝찔한 눈물을 삼키면서 화순은 가만히 웃었다.행복이라구? 그럼 행복이고 말고.
모처럼 사람 같은 일 한번 하지 않았나.좋아했던 남자가 가는길에 그래도 돌덩이 하나는 치운 셈이니까 말이다.
그렇다.잊어야 할 남자도 있는 여자가 되었다는 거,잊지 못해견뎌내기 힘든 남자가 있는 여자가 되었다는 거,그게 여자의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랴.
서방덕에 옷입고 밥 먹으며 벌어다 주는대로 살면서 자식 놓고길러가는 것만이 여자의 행복은 아니란다.
그건 그런 여자의 행복이겠지.복 많다고 하는 여자들의 행복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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