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아의 말하기 칼럼] ‘문제 정의’ 가 중요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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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27면

생명과 관련된 논쟁들을 토론하다 보면 대개 생명을 옹호하는 쪽이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어 낙태와 관련된 토론에서 ‘배속의 태아도 생명’임을 근거로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낙태반대론(pro-life)이 유리하다. 낙태찬성론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반생명(anti-life) 세력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그러다 낙태찬성론자 진영에서 생각해 낸 개념이 바로 선택옹호(pro-choice)다. ‘우리는 반(反)생명주의자가 아니라 친(親)선택주의자’라는 개념을 잡고 ‘생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낙태찬성론자들의 주장은 힘을 얻었다.

정책을 만들든, 어떤 주장을 하든 그 정곡을 찌르는 개념의 선택이 참으로 중요하다. 정곡을 찌르는 개념은 제대로 된 ‘문제 정의(problem definition)’에서 나온다. 문제 정의란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말한다.

복지 정책을 한번 살펴보자. 국민의 복지란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노후 연금의 광범위한 확산인가, 건강보험 혜택의 증가인가, 아님 사회 차별의 철폐인가. ‘국민들은 자신의 일을 가지고 즐겁게 일할 수 있을 때 자신의 복지(행복한 삶)가 성취되었다고 피부로 느낀다’는 결론을 얻은 정부에 ‘복지란 일자리’가 된다. 복지를 ‘일할 수 있는 기회’로 정의하고 ‘일자리 창출’을 정책의 기조로 삼게 된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 정의들은 영원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어느 시대에는 그것이 복지의 관건이던 것이,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다른 것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고 판단되면 그것이 복지의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남녀평등의 문제도 ‘노동 시장에서 성차별이 없어지면 평등해지는 것’이란 시각에서 ‘직장과 가정 내에서 남녀의 의무에 균형이 있어야 평등한 것’이라는 시각으로 진화돼 왔다. ‘이것이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도 진화하고 문제를 보는 시각도, 이를 해결하려는 정책 당국과 국민도 다 함께 진화하기 때문이다. 진화하며 경합하는 여러 문제 정의들 중 우세한 어느 하나가 채택된다.

보수와 진보 진영의 시각차란 결국 ‘사회의 진정한 발전은 무엇이며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정의의 차이다. 이번 대선의 결과는 국민들이 지난 10년간과 다른 문제 정의를 원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국민이 원하는 건 정책 자체의 변화일 수도 있으나, 지금까지의 정책들이 제대로 채택하지 못한 문제 정의를 확실히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햇볕정책은 언론이 만들어낸 ‘퍼주기’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문제 정의를 국민의 뇌리에 남기지 못했고, 대언론정책은 ‘대못질’이라는 개념에 대적할 만한 문제 정의 만들기에 실패했다. 낙태찬성론이 결과적으로는 ‘반생명’이 될지라도 그 진정한 취지는 ‘선택옹호’이듯이, 결과적으로는 많이 주고 문을 잠근 것이더라도 퍼주기나 대못질은 아닌, ‘나누기’나 ‘거리 두기’ 같은 정책의 선한 개념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다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 그’처럼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개념의 채택과 그에 대한 고민은 건강한 정책 수립의 관건이 될 수 있다. 정확한 문제의 인식과 정의,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개념들로 구성된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될’ 정책들을 보고 싶다.

2008년 지면 개편에 따라 ‘말하기 칼럼’은 이번회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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