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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한다는 자체가 명상이고 참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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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국인의 피에는 서예의 맥이 흐르고 있어요.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누구나 서예 작품을 나름의 방법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일반인을 위한 서예책 『추사를 넘어』(푸른역사)를 낸 김종헌(60)씨는 “우리나라 서예계의 고질적 풍토인 문벌주의에서 벗어나 서예 읽기의 즐거움을 쉽게 설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억대 연봉 CEO직을 내던지고 산골 카페 주인이 돼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스물 일곱살에 입사한 ㈜남영비비안에서 사장까지 올라가며 승승장구했던 그는 2003년 강원도 홍천에서 북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의 주인으로 인생 제2막을 열었다. 매일 술에 쩔어 사는 생활을 끝내고 틈틈이 글도 쓰며 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그 초심은 순조롭게 지켜지고 있다. 그 뒤 결혼 30주년 기념문집인 『피스 오브 마인드-빵 굽는 아내와 CEO 남편의 전원일기』와 30년 직장생활의 체험을 전하는 『남자 나이 마흔에는 결심을 해야 한다』 두 권의 저서를 내놨고, 이번엔 자신의 취미인 서예를 테마로 또 한 권의 책을 쓴 것이다.

그는 중학생 시절부터 붓을 잡았다. 원곡 김기승, 소지도인 강창원, 송천 정하건 등 손꼽히는 서예 대가들을 사사했다.

“원곡은 박정희 대통령의, 송천은 이병철 삼성 회장의 서예 스승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분들 밑에서 공부하며 차츰 서예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안목을 키웠지요.”

하지만 그에게 ‘추사체’는 늘 숙제 같은 글씨였다. 우리 역사상 제일가는 서예가로 꼽히는 추사의 글씨가 왜 좋은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

그 답을 찾은 건 1980년대 초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였다. 유럽 지사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 화랑에서 판교 정섭(1693~1765)의 기괴하고 참신한 서체를 만나면서 파격 속의 균제미를 비로소 발견했다.

“판교의 글씨를 보면서 추사체의 가치를 알게 됐어요. 판교가 이룬 표현주의 서예의 성과 위에 옛사람들의 정신과 법식을 집대성해 예술적 완성을 이룬 게 추사체지요.”

하지만 그는 “추사체를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은 무의미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추사체를 답습만 해서는 형태만 그릴 뿐 깊고 높은 의취(意趣)를 담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추사를 넘어’란 책 제목도 그래서 나왔다. 책은 추사체의 감상법을 전하면서 ‘추사’라는 거봉을 넘으려 고군분투한 근현대 서예가 다섯명의 삶과 예술세계도 조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가장 인격과 합치되는 필체를 남긴 도마 안중근, 중풍으로 오른손을 쓰지 못하게 된 뒤 좌수서(左手書)의 신경지를 개척한 검여 유희강 등이 그들이다.

김씨는 서예와 멀어진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도 전했다. 젊은 한글세대들에게 “서예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명상이고 참선”이라며 작품 감상을 넘어 직접 붓글씨를 써 볼 것을 권했다. 그러면서 서예의 실용적인 가치까지 강조한다.

“제 경우 직장생활에도 서예가 큰 도움이 됐어요. 서예를 배우면서 머리 속에 각인된 선·면·여백 등에 대한 미적감각이 광고와 영업 등에 그대로 응용됐으니까요.”

글=이지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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