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그리고,산 자도 말이 없었다(22) 지금쯤 바다를 건넜을까.화순은 고개를 돌려 길남이 일행이 떠나갔을바다 쪽을 바라보았다.가슴에는 무서리가 내리는 것 같았다.
가야 한다.가서 살아야 한다.네가 살면,그래서 목숨 이어가며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난 이제부터 죽은 목숨이어도 좋다. 크레졸을 마시고 죽은 여자애가 있었다.같은 유곽에 있던 아이였다.조선서 무엇을 했는지 통 말이 없었지만, 그애는 화순이랑은 달랐었다.술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주인말에도 늘 고분고분했다.나이가 어려서 화순이를 언니 언니하며 불렀었다 .
그런 그녀를 두고 술 취하는 날이면,화순이 이따금 말하곤 했었다. 『저년은 갈보짓하러 태어난년 같다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아무 대꾸가 없던 아이였다.
그러다가 대답한다는 것도 두꺼비 파리잡아 먹듯 떠듬떠듬 속을알 수 없는 말을 한마디씩 해서,저게 그래도 뭔가 속에 품고 있는 게 있나봐.그런 생각을 하게 했던 아이였다.
길자라는 말을 그대로 일본말로 옮겨서,유곽에서는 요시코라고 불렀었다.
『언니,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답니다.』 『굼벵이만 재주가있냐.주름잡는 재주야 번데기 따라갈 게 없고,지렁이도 이것아 땅파고 들어가 엎드리는 재주는 천하일품이란다.』 눈을 멀뚱거리면서 그럴 때 길자는 물었었다.
『언니는 무슨 재주로 사는 거유?』 『나? 술먹는 재주로 산다.』 아주 술이 엉망으로 취했던 날,길자는 똑같은 말로 물었었다. 『언니는 무슨 재주로 살우?』 『명이 기니까 살지.재주는 무슨 재주니.』 『그래도 사람이 무슨 낙이 있어야지요.』 『낙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그래 이년아.나는 왜놈 밑 받쳐주는 낙으로 산다.』 『나는 말이유…내일 죽을까,모레 죽을까…그 낙으로 산다우.물에 빠져 죽을까 아니면 목 매달아 죽을까,그러면서….』 『예 이년아.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죽을 때 되면 그렇게 공들이지 않아도 죽게 된다.그러고 보니 이년이 아주순 미친년일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