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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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저기 두번째에 있는 여학생이 계희수라는 애거든요,좀 불러주시겠습니까.멍달수라는 친구가 밖에서 기다린다고 그러면 알 겁니다.』 내 부탁에,연습실로 들어서던 한 여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윤찬이에게는 잠시 아래층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게좋겠다고 그랬다.최소한의 격식과 극적 만남을 위해서라고 내가 설명해주었다.
『어마… 멍달수가 웬 일?』 희수가 타이즈 위에 앞이 트인 새빨간 스웨터를 걸치고 나타났다.오랜만에 보는 희수는 윤찬이 마음을 졸일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축하해.내친구 중에 너한테 빠진 남자가 있거든.이거 언제 끝나지? 우리가〈아무데나〉에서 기다리고 있을께.』 희수는 희미하게 웃어대면서 잠시 상황을 검토하는 것같았다.
『알았어.내가 그리로 갈께.어쨌든 날 기다려준다니까.』 계단을 내려서면서 나는 괜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계희수와는 수련회에 다녀온 며칠후에 교문 근처에서 우연히 한번 만나고 나서는 처음이었다.이상하게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나는 무의식적으로나마 희수를 어느정도 두려워하고 있었 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희수는 결코 자랑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자기 이야기를 내게 다 말해주었고,나는 어쩐지 그것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몰랐다.막연한 거였지만,나는 내가 희수에게 더 다가가면 결국 무슨 사고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감한 거였는지도 몰랐다.
가령 형이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사고 말이다.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갈수는 있어도 물을 먹는건 말의 자유야.그대의 천사는 〈아무데나〉로 나오시겠다고 그랬어.』 내 말에,일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찬이 활짝 웃었다.우리는 도서관에 들러 소라를 데리고 가자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아는대로 솔직히 말해봐.어떤 앤지.평판이라는 게 있잖아.』도서관으로 가는 길에서 윤찬이 내게 희수에 대해서 물었다.소라가 합치기 전에 알아둬야겠다는 태도였다.
『이거 왜이래.진짜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풍문이나 시중의 평판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거라잖아.』 『뭔가 좋은 이야기는 아닌것 같은데….』 윤찬이가 말하면서 돌멩이 하나를 툭 걷어찼다. 『아냐.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라… 괜히 네 기대치를 부풀려 놓고 싶지는 않다 이거지.내가 보기엔… 아주 멋있는애야.…진심이야.』 정말 진심이기도 했다.내게 온 선물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처럼,어쩐지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어쩐지 조금 아깝기도 했지만.
도서관에서 리포트를 쓰고 있던 소라를 불러내서 나오는데,누군가 뒤쪽에서 「채소라」하고 불렀다.돌아보니 덩치가 큰 남학생들몇이 몰려서서 소라를 손짓으로 부르고 있었다.
『무슨 운동선수라는데요,3학년이구요,계속 저러니까 무서워 죽겠어.』 소라가 울상을 지어보이며 속삭였다.그러자 윤찬이 덩치들 쪽으로 다가갔다.나는 소라의 곁에서 덩치들과 윤찬이 서로 어깨에 힘들을 주고 무어라고 말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긴장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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