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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중국문화지도 <7> 영화 2. 주선율과 하세편의 이중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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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관람료가 비싸 영화관 나들이가 쉽지 않은 중국 극장가도 연말연시가 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12월부터 설연휴 무렵까지, 이른바 ‘하세편(賀歲片)’으로 불리는 자국산 흥행영화들이 집중적으로 개봉하기 때문. 올 하세편의 첫주자는 13일 개봉한 ‘투명장’. 홍콩출신 천커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리롄제·류더화 등이 주연한 시대액션물로, 제작비 300억원대의 대작이다. 다음주에는 펑샤오강 감독의 전쟁물 ‘집결호’(20일)가 개봉한다. 역시 100억원대 대작이다. “이 무렵에 개봉한다고 다 하세편이 아니다”라는 한 중국관객의 말처럼, 하세편은 연말연시를 겨냥한 영화 중에도 대작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중국 극장가에 ‘하세편’이라는 이름이 자리잡게 된 것은 10년 전, 펑샤오강의 ‘갑방을방’부터다. 지금만큼 대규모 제작비를 들인 작품은 아니었지만, 1997년 말 개봉해 이듬해 중국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네 명의 젊은이들이 하루 동안 고객의 소원을 들어주는 사업을 벌이는 내용의 코미디다. 펑샤오강은 이처럼 중국인들의 현대 도시생활을 다룬 코미디를 연달아 하세편으로 성공시켜 5년 연속 중국영화 흥행을 주도했다. 그 결과 한때 한국에 ‘명절에는 코미디’라는 말이 돌았듯, 펑샤오강의 코미디는 하세편의 대표브랜드로 자리를 굳힌다. ‘갑방을방’의 주연배우 거유(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으로 94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역시 거듭 출연해 하세편, 하면 관객들이 떠올리는 단골배우가 된다.

펑샤오강은 여러 모로 장이머우·첸카이거와 대비되는 감독이다. 예술영화로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고 상업대작으로 돌아선 두 선배 감독과 달리, 처음부터 자국관객을 겨냥한 대중영화로 출발했다. 장이머우·천카이거가 영화학교 출신의 엘리트인 반면, 군복무를 마치고 TV드라마의 미술담당부터 시작한 이력도 독특하다. 연출 데뷔도 영화보다 TV드라마로 먼저 했다. 특히 TV시절부터 소설가 왕쑤어와 교분이 두터워 그를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인들의 그룹 ‘왕쑤어 패밀리’의 일원으로 꼽혔다. 왕쑤어는 80년대부터 도시인들의 새로운 생활상을 묘파한 소설들로 인기를 누린 작가. 지앙원 감독의 ‘햇빛 찬란한 날들’ 등 그의 작품이 영화·드라마로 속속 제작되는 붐이 일기도 했다.

코미디 위주였던 하세편은 2002년말 장이머우 감독의 시대극 ‘영웅’이 가세하면서 지평이 넓어졌다. 펑샤오강도 지난해에는 코미디가 아닌 시대극 하세편 ‘야연’을 내놓았고, 최신작 ‘집결호’에서는 중국 상업영화 최초로 전쟁 스펙터클을 시도한다. 올 부산영화제를 찾았던 그는 “주선율이 아닌 민간영화에서 시도하기는 처음”이라고 소개했다.

사실 현대사는 정부 주도로 만들어지는 사회주의 특유의 선전선동영화, 즉 ‘주선율(主旋律)’영화가 주로 다뤄온 소재다. 사회주의 윤리의식과 가족주의를 포함한 집단의식을 고취하는 것이 주내용이다. 특히 개혁개방이 본격화된 90년대 이후 활발하게 제작됐다. 보는 사람에 따라 주선율의 범주도 다양한데, 국민당과의 대결 같은 현대사의 주요 사건(‘대결전’‘대전환’‘개국대전’등)이나 현대사의 주요인물(‘마오쩌둥’‘마오쩌둥과 그 아들’‘저우언라이’등)은 이견이 별로 없는 주선율영화의 대표적 소재다. 중국공산당 창당기념일 등 특정시기에 맞춰 제작되곤 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보다 한결 일상적인 배경에서 보통 사람에 가까운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주선율영화도 나왔다. ‘자오위루’(90년) ‘궁판썬’(95년) ‘레이펑이 떠난 날’(96년)은 모두 실존인물이 모티브다. 레이펑은 군복부 도중 22살의 나이로 순직해 6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따라배우기 운동이 벌어졌던 인민영웅. 영화는 레이펑이 죽은 뒤 괴로워하던 동료가 일상에서 작은 선행을 하며 변모하는 모습을 그렸다. 자오위루·궁판썬 역시 말단공무원으로 시골마을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해 사회적 모범이 된 ‘작은 영웅’들이다.

사회 전반의 변화와 상업영화에 대한 관객 취향이 개발되면서 주선율영화에 오락적 요소를 다양하게 시도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홍콩스타 고 장궈룽을 주연으로 기용한 ‘홍색연인’(98년)처럼 과거의 기준으로는 주선율로 보기 힘든 영화도 나왔다. 일제강점기 상하이를 무대로 지하에서 활동중인 공산당원들의 로맨스가 주내용이다.

하세편이 상징하는 상업영화와 주선율영화, 그리고 흥행성적은 미미하나 국제영화제에서 호평받는 예술영화는 중국영화의 3대 흐름으로 꼽힌다. 하세편이 약진하는 중에도 주선율영화는 꾸준히 제작된다. 90년대초부터 점진적인 정책변화가 진행중이되, 아직은 정부주도의 제한된 시장인 중국영화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선율(主旋律)영화=사회주의적 윤리의식, 국가·가족 등 집단주의를 고취하는 영화. 중국현대사의 주요사건·인물을 다룬 작품이 대표적이다.

◆하세편(賀歲片)=연말연시 흥행대목을 겨냥해 개봉하는 상업영화. 1997년말 펑샤오강 감독의 코미디’갑방을방’의 대성공이 효시가 됐다.

베이징=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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