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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기부문화 뿌리 내리게 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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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거리에 구세군 냄비가 등장하고 독지가들의 기부가 줄을 잇기 시작하는 걸 보니 연말연시가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즈음이면 각종 언론매체도 새삼 기부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때로는 팔 걷어붙이고 직접 모금에 앞장서기도 한다. 날씨도 추운 세모에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온정이야 아무리 칭송해도 모자랄 만큼 훌륭하고 고마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이맘때만 되면 이어지는 기부행렬을 볼 적마다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 나눔의 문화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고 기업들도 사회공헌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봉사활동이나 기부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기부문화가 질적인 성장도 수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문제점으로 흔히 개인기부보다 기업기부 중심이고, 기업기부도 준조세 성격의 비자발적 기부가 대부분이며, 연말연시에 집중돼 일회성 이벤트로 그치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된다. 이러니 기부를 받는 측은 어려운 사람들이 연말연시에만 어려우냐는 하소연을 하게 되고, 기업 측은 연말연시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자기들만 쳐다보는 사회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불만을 털어놓게 된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도 기부를 체면치레나 보신의 수단으로 여겨 진정한 사회공헌보다는 홍보를 위한 활동에 더 열을 올려온 것도 사실이다.

바람직한 기부는 기업 중심의 다액소수기부가 아니라 적은 액수라도 개인이 중심이 되는 소액다수의 기부다. 연말연시에 세금 납부하듯 마지못해 하는 억지춘향식 기부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정기적·상시적으로 하는 기부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부문화의 토양은 아직 척박하다. 우리나라 개인기부의 주역이 아직도 김밥 할머니, 삯바느질 할머니를 비롯한 수없는 할머니들이라는 사실이 그런 현실을 웅변으로 말해 준다. 올 연말에도 예외 없이 할머니들의 기부가 줄을 잇고 있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할머니들에게 나눔의 책무를 맡겨 놓을 것인가.

건전한 기부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 선결돼야 할 문제가 많다. 먼저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모범적인 기부가 많아져야 하고, 또 그들을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 기부문화다. 그 정점에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사회에 쾌척한 카네기와 록펠러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으며, 그들의 정신이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같은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기업의 기부는 있어도 기업인의 기부는 드물며, 그나마도 일부는 순수성 시비가 일고 있는 형편이다.

둘째, 가정과 학교에서 기부에 대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자선은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외국 속담처럼 이제 우리도 가정에서 봉사하고 기부하는 교육을 해야 할 때다. 선행을 하는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선을 베풀게 된다. 학교나 직장에서도 기부와 봉사에 대한 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져 자선활동이 시민들의 일상에 녹아 들게 해야 한다.  

셋째, 기부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시급하다. 특히 기부자에 대한 세제혜택이 대폭 커져야 한다. 최근 정부는 개인 기부금에 대한 소득공제의 폭을 넓혔으나 아직도 선진국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친다. 개인뿐 아니라 기업의 기부에 대한 세제혜택도 확대돼야 한다. 또 기부의 수혜자인 비영리조직들도 기부금의 관리와 배분에 있어 투명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고 경영역량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기부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양극화 문제를 갈등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이 메마른 땅에도 기부의 단비가 내리고 박애의 정신이 물결 치면 좋겠다.

예종석 한양대 경영대학장·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