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진혁 칼럼

보스들이 비겁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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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요즘 전직 대통령들의 처신을 보고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나라의 대통령쯤 지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둘째아들의 소위 괴자금에서 숨겨둔 뭉칫돈이 발견됐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왜 말이 없는가. 자기에겐 29만원뿐이라고 능청을 떨고 기르던 개까지 경매에 부치게 한 그였다. 이제 다시 숨겨 놓은 돈 문제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으니 그런 사람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국민의 수치가 되고 말았다. 왜 툭툭 털지 못할까. 내가 가진 게 다 이것이오, 다 가져가시오 하고 왜 털어버리지 못할까. 그렇다고 굶을까, 쪼들릴까. 별을 4개나 어깨에 붙이고 7년반이나 대통령을 지낸 인물의 처신이 너무나 비겁하다. 그의 재임 기간 경제 안정을 평가하던 사람들도 이젠 그런 평가를 입에 올리는 게 무색하게 돼버렸다.

*** 전직 대통령들 처신에 실망감

全씨뿐 아니다. YS는 어떤가. 사실 사리를 따지자면 YS는 강삼재(姜三載)의원이 법정에서 "그 돈은 YS가 청와대 집무실에서 직접 준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기 전에 입을 열었어야 옳았다. 스스로 "이 사건을 책임질 사람은 본인이오"하고 나서는 것이 당당했다. 그러나 YS는 자신이 한때 극진히 총애한 姜의원이 감옥 문턱에 갈 때까지도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이제 와서 보면 그 돈의 최종 책임이 YS에게 돌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부하들만 감옥에 보내고 자기책임은 회피하면서 명예 유지에 급급한 것이 지도자의 처신일 수는 없다. 자기의 큰 업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인데 자신은 역사를 거꾸로 세울 작정인지 딱한 일이다.

DJ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대북 불법 송금으로 감옥에 가고 재판을 받은 그의 측근들은 누구 때문에 그런 불법행위를 했겠는가. 거액의 정치자금을 주무르면서 당 후보들에게 선거 뒷돈을 대준 권노갑(權魯甲)씨는 오직 자기 의사로, 자기 득세를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일까. 그러나 아직껏 DJ는 이들과 책임을 나누려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일의 인과관계를 볼 때 대북 송금이나 정치자금 사건에서 DJ의 몫은 없는 걸까.

보스들은 책임을 안 지고 부하들만 희생당하는 이런 누추하고, 법이나 도덕에도 맞지 않는 관행(?)은 불행하게도 대(代)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지난 대선의 불법 자금 문제로 노무현.이회창 진영의 중요 간부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 있지만 그 돈으로 자기 선거운동을 한 盧.李씨 본인들은 건재하다. 얼마 전 성공회 사제단 20여명이 열린우리당을 찾아가 구속된 이재정(李在禎.성공회 신부)전 의원 문제로 거세게 항의했다고 한다. 한 신부는 "돈을 받아쓴 대통령은 멀쩡한데 단순히 돈을 받아 전달한 李전의원만 처벌하느냐"고 울분을 토로했다고 한다. 李전의원 본인은 스스로 참회하고 국민에게 사과했지만 정작 그 돈의 최종 수혜자로부터는 李전의원 문제에 대해 어떤 책임을 느낀다는 말 한마디 들린 적이 없었다.

*** 그들이 누구 때문에 감옥 갔나

어찌 李전의원뿐이겠는가. 盧대통령 측근인 안희정.이광재.강금원.문병욱씨 등과 정대철.이상수 의원 등 수많은 사람이 누구 때문에 돈을 주고받고, 누구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됐는가. 그러나 盧대통령은 말이 없다. 심지어 세상에선 6백억원대 O원이 말이 되느냐, 盧대통령이 돈을 직접 받았다, 아니다 따위의 온갖 말들이 오가지만 盧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다. 자기에 관한 문제인데 왜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을까, 왜 실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내 책임이오 하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이회창씨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제 책임" 이라며 자기가 감옥에 가겠다고 말은 해놓고 그 후 불법자금이 1백억원이 더 나오고, 2백억원이 더 나와도 통 말이 없다. 자기는 정말 그 돈을 모른다는 것인가. 지난 번 기자회견에서는 "기업들이 과연 누구를 보고 그 큰 돈을 주었겠나"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 대신 감옥에 간 사람들을 빨리 풀려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책임과 허물은 몽땅 부하에게 뒤집어 씌우고 권력과 명예는 자기가 차지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일 수는 없다. 비겁한 보스들의 나쁜 관행 역시 빨리 극복해야 할 커다란 정치개혁 과제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