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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탓에 난처해진 블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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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라크 전쟁에 대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행동은 처음부터 이해하기 힘들었다. 블레어 총리가 강한 도덕적 신념을 바탕으로 후세인의 실각을 주장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국민은 처음부터 이 전쟁을 반대했었고 그 와중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지지한 블레어는 아무런 정치적 이익도 얻지 못했다. 블레어는 부시의 호의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거꾸로 워싱턴에서의 영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상실했다. 멋대로 범대서양주의(서유럽과 미국의 긴밀한 군사.정치.경제 분야 협력을 주장하는 것)를 추구하고 분열을 초래한다는 좋지 않은 이미지도 심화됐다.

영국의 상.하원 합동 정보위원회 전 의장인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블레어에 대해 "이유없이 고개를 숙이는 자는 결국 아무런 영향력도 못 갖는 이류에 머물게 될 뿐"이라고 주문했다. 영향력을 가지려면 당당하게 국익을 강조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선 협력관계를 깰 수도 있음을 명백히 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블레어는 심지어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미국은 영국의 도움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데도 끝까지 미국 편을 들었다. 심지어 미국은 팔레스타인과의 협력을 도모하려는 영국을 무시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로드맵 구상에서 영국을 제외시키기도 했다. 이제 블레어는 곤경에 빠졌다. 지난 가을 파병 결정과 그 후의 모든 결정들이 얄팍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란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미 국방부의 폴 울포위츠 부장관은 잡지 '배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전쟁 결정의 전말을 설명하면서 지난해 부시 정권이 전쟁을 일으키기를 원하긴 했으나 뚜렷한 명분은 없었음을 암시했다. 당시 정부 관리들이 회의에서 내린 핵심 결론은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미 중앙정보국(CIA).국방정보국(DIA).유엔 모두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는 미 정부 내에 가상현실로 굳어졌다.

그 후 미국의 강력한 선전 시스템은 미국민과 세계인에게 이라크의 위험성을 설득했다. 영국도 이에 맞춰 이라크 내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문서를 증거로 제시했지만 그 문서들은 나중에 결국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영.미 연합군은 대량살상무기 문제에 대해 합당한 설명을 요구받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처음에는 무기가 시리아로 옮겨져 은닉됐다는 설이 나돌았다. 한때 럼즈펠드 장관은 "이라크가 전쟁 발발 전에 무기를 모두 파괴하고 증거를 인멸했다"고 설명하더니 곧 "대량살상무기는 분명히 있으며 곧 발견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라크의 미군 지휘관들이 "이라크 영토가 넓어 무기를 발견하려면 몇 년은 걸릴 것"이라고 에두를라치면, 부시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했다"는 말을 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결국 찾아낼 것" 이라고 강한 확신을 드러내고 있지만 블레어 총리는 " 영.미 연합은 무기를 찾아내는 일 외에도 긴급한 당면과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자락 까는 등 종잡을 수가 없다. 사실 대다수 미국인은 이 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의회는 전쟁 명분이 정당했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 문제를 조사하는 청문회가 열려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어가고 있다.

영국 정부도 국민을 상대로 정치 게임을 벌였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그러나 미국처럼 뻔뻔하진 않다는 게 여론이며 블레어에 대한 평가도 관대한 편이다. 로빈 쿡 전 외무장관은 독립 조사를 요청했고 의회 대외관계위원회는 지난 10일 "영국의 파병결정 과정을 조사하고 이라크 관련 문건이 미국에 제공되기 전 조작됐는지도 조사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다. 최종 보고서는 의회가 아닌 총리에게 보고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워싱턴의 청문회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영국에서도 조용히 넘어가긴 힘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블레어는 너무 미국에 의지했었음을 후회할 것이다.

윌리엄 파프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 칼럼니스트
정리=김은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