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5.카오스 ○16 난 사실 발레 말고는 아무 것도 할줄 아는게 없었어.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발레를 했거든.발톱이 수십 번씩 빠져가면서도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바라지 않았다니까.그래서 예고에 진학해서도 열심히 발레를 했구,대 학에서도 물론 발레를 전공하는 것 말고는 생각해본 게 없었어.내가 국문과 학생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이거야. 그런데 예고 2학년 2학기 때였어.러시아에「볼쇼이 발레단」이라구 아주 세계적인 발레단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였는데 말이야,기막힌 기회가 있었어.뭐냐믄… 볼쇼이 발레단에서 1년동안교육받을 연수생을 우리나라에서 뽑기로 한거야.그리고 거기에 뽑히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이대 무용과에 특기생으로 입학자격이 주어지는 거야.
어지간히 발레를 한다는 애들은 몽땅 몰려들었어.볼쇼이 연수생자리를 놓고 말이야.우리학교에서는 송미경이라구 걔하고 나하고가그래도 제일 잘 한다고 그러는 후보였어.예고 중에서는 우리학교가 또 제일 괜찮다고 하는 학교였으니까 미경이 하고 내가 볼쇼이에 뽑힐 가능성이 제일 높은 후보였던 셈이지 뭐.
미경이는 언제나 자기보다 내가 한수 위라고 나를 치켜세웠지만,사실 미경이도 만만치 않았던 건 사실이야.게다가 미경이 엄마는 극성이 대단했어.소문을 들으니까 미경이 엄마가 사방팔방으로뛰어다니면서 로비를 벌인다는 거였어.미경이 아빠 는 정부의 무슨 높은 사람이라고도 하구 말이야.
심사를 두 주일쯤 남겨놓았을 때였나 봐.미경이가 아주 중요한정보를 내게 알려줬어.미경이 엄마가 어렵게 알아낸 거라면서 말이야.뭐냐믄… 볼쇼이 발레단의 심사위원들은 그랑주테와 스트레치동작을 보고 연수생을 뽑는다는 이야기였어.그랑 주테라는 건 점프와 착지 동작을 말하는 거야.스트레치라는 건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몸을 최대한 펼쳐보이는 기술이구.
하여간 난 아찔했어.왜냐하면 난 그 당시에 무릎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야.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그랑주테가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거든.그런데 하필이면 그랑주테를 중점적으로 본다는 거였던 거야.할수 없었어.연습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 내가 무리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해.제대로 먹지도 않고… 발레는 무조건 마를수록 좋거든.몸이 가벼워야 점프했다가 착지할 때 발목이나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기도 하고… 잠도 못잤어.걱정이 돼서 그랬지 뭐.그런 상태에서 연습은 무리하게 계속했으니까… 내가 미련했던 거긴 해.
그랑주테 연습을 하다가 기여코 발목을 상하고 말았어.몸을 화악 날렸다가 공중에서 두바퀴를 도는데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거야.착지하면서 발이 엉켰나 봐.같이 연습하던 아이들과 선생님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어.거기 미경이 얼굴도 보였어.난 발목이 아픈 것도 잊고 무작정 눈물부터 나는 거야.아 끝났구나그런 생각만 나는 거였어.
결국 나는 심사장에 나가지도 못했구,미경이가 연수생으로 뽑혔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었어.미경이는 한달 뒤에 러시아로 떠났는데,그때까지 내게 전화 한번 해주지 않았어.
모르지 뭐.나중에 이야기를 들은건데,볼쇼이 발레단의 심사위원들은 후보들의 체격과 워킹만을 주로 봤다는 거였어.가능성 위주의 심사였다는 거지.그랑주테는 요구하지도 않았다는 거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