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지하철에서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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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영미(1961~) '지하철에서 1' 전문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스무살적 나는 커피를 좋아했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실존하는 커피보다는 관념으로서의 커피를 좋아했다. 커피의 맛과 향기, 따뜻한 감촉들이 너무 좋았지만 내게는 그 마술적인 음료를 사마실 돈이 없었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 허공 중에 손가락으로 쓰곤 했다. ㅋ ㅓ ㅍ ㅣ. 자음과 모음을 하나 하나 적어나갈 때마다 세상의 모든 길 위에서 커피 냄새가 났다. 건물들, 나무들, 먼지낀 유리창들, 구름들, 김이 솟아오르는 만두가게의 검정솥과 버스 안내양의 오라잇!, 하는 발차소리…. 오감에 걸리는 모든 풍경들 속에서 따뜻한 커피냄새가 났다. 두 손을 모아 허공 속에 공손히 내밀고는 한참을 서 있다가 입에 가져가면 그 관념적인, 행복한 음료 마시기는 끝이 났다. 그 무렵엔 하루 한끼를 먹고 열 편이나 스무 편의 시를 썼다.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사치였던 그 시절, 적어도 그 시절에 우리 모두는 끔찍한 밥벌레가 아니었음을….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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