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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에게 배우는 직장인 성공학] ⑤ 조형기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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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전략기획실에서 근무하는 당신은 기획업무 대신 궂은 일만 도맡아 한다. 자신은 기획통이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지만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원치 않는 역할이지만 부서 내에서 입지를 굳혔다고 생각한 순간, 술김에 대형사고까지 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는 당신에게 영업부로 발령을 냈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은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능 프로그램의 감초격인 조형기(49)의 1990년대 초 상황이 꼭 이랬다. 그는 83년 문화방송(MBC) 탤런트 15기로 데뷔했다. 개성 강한 외모에 탄탄한 연기력, 원로배우 조항의 아들이라는 후광이 그의 연기생활의 자산이었다. 그러나 그 후 10여년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악역뿐이었다. 그것도 드라마에 잠깐 얼굴을 내미는 조역에 불과했다. 한때 비중 있는 악역으로 반짝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러다 음주 운전사고를 내고 말았다. 불운의 연속인 그에게 개그맨 뺨치는 코믹 연기를 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신인 연기자가 주연인 한 드라마의 조역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그 역을 맡았다.

당시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는 사상 초유의 대성공을 거뒀다. 이 드라마는 차인표라는 신인 연기자를 대스타로 만들었고 조형기에게는 재기의 발판이 됐다. 혼신의 코믹 연기 이후 그에게는 정작 드라마보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 섭외가 쇄도했다. 그는 이것도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탤런트실에서는 그의 행보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탤런트실 붙박이로만 만족할 수 없었다. 연예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연기든 예능 프로그램의 엔터테이너든,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오늘날 조형기가 말하는 자신의 생존 비법은 바로 이때 형성됐다.

“자신을 1인 회사의 사장이라고 친다면, 회사를 편의점식으로 꾸며라. 이것저것 진열해놓고 기회를 노려라.”

[사진=이여영 기자]

지금이야 탤런트가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비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나 그 길은 조형기가 어렵사리 개척한 외로운 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탤런트 예능인’으로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다. 방송가에서 조형기의 성공 비결로 꼽는 것은 역시 진행자나 개그맨 뺨치는 애드립이다. 그 무궁무진한 순발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는 “개그맨이 아니기 때문에 웃겨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나만의 최대 장점”이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다른 출연자가 뭔가 재미있는 말을 하면 그걸 뒷받침해주는 데 주력한다고 한다. 너무 튀려고 하다 보면 실수만 연발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애드립의 소재 역시 억지스럽지 않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한 때 그의 대표 유행어였던 ‘장 지기지기…’는 팝송 전주를 입으로 옮기던 학창시절 경험에서 비롯됐다. 단어별로 또박또박 발음하는 조형기식 팝송 역시 학창시절 버릇을 되살린 것이다. 한 토크쇼에서는 가위바위보 놀이를 예전 방식대로 ‘쨩껨뽀’로 표현해, 본의 아니게 일본식 표현을 유행시킨 적도 있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그가 10대 연예인들과 함께 무대에 서서, 자신만의 입담을 뽐내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연예계에서 오지랖 넓기로 소문난 그의 대인관계론도 독특하다. 남이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에 더 눈길을 돌린다. 그는 연예계에서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다고 털어놓는다. ‘일로 만난 사람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다 보면 상처받을 일이 많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어느 한 쪽이 잘 나가서 연락을 못하게 되면 상대방은 크게 서운해한다. 조형기는 “직장 생활도 그렇지만, 연예계 내의 인간관계에서는 잘 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뚜렷이 구분돼 서로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더 다독거리는 편이다. 촬영장에 가면 그는 감독을 챙기는 법이 별로 없다. 대신 뒷전에서 고생하는 스태프들에게 통닭이라도 한 마리 시켜주고 말을 걸고는 한다. 잘 나가는 동료 연예인의 결혼식에는 화환만 챙기지만, 좀 어렵게 지내는 이의 경조사에는 꼭 얼굴을 내민다. 방송국이나 프로듀서(PD)들에게는 재능 있지만 까칠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방송가에서 결코 그의 평판이 나빠지지 않는 것도 이런 마음 씀씀이 덕분이다. 그래서 그가 영업부로 갈지 말지를 고민할 직장인들에게 던지는 충고가 단순히 교과서 같은 얘기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자신을 파악하고 나면, 남이 가지 않는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남들이 뭐라고 하든 부끄러워하지도 말라.”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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