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해 10대서 2007년엔 5만 대로 회장님차 → 대중 가까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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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회장님이 벤츠를 사고 싶어 하시는데, 한번 와줄 수 있어요?”

 1987년 12월 한성자동차 정만기(54·당시 과장) 상무는 한 식품회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장 회장실로 달려간 그가 벤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풀옵션으로 사겠다”고 했다. 1억9000만원짜리 벤츠 560SEL이 팔리는 순간이었다. 정 상무는 “계약금만 5000만원이라고 해야 하는데, 당시로는 너무 큰 금액이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차는 수입차 시장이 개방된 뒤 우리나라에서 판매된 수입차 1호로 기록됐다. 이전까지 주한 외교관이나 미군 고위 인사들만 외제차를 타고 다녔다. 수입차가 개방된 첫해에 국내에서 팔린 수입차는 고작 벤츠 10대. 당시 수입차는 양담배와 함께 사치품의 대명사였다. 정 상무가 공략한 고객은 대기업 회장들. 알 만한 기업 비서실은 모두 돌아다니며 명함을 돌렸다. 하지만 수입차에 대한 사회적 반감은 심했다.

 “대부분 고객이 ‘수입차 사면 세무조사 당하지 않느냐, 사업하는 데 불이익은 없느냐’고 걱정했어요. 실제로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는 이유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은 고객도 많았고요.” 정 상무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특별 사정’ ‘호화 사치품 사용자 일제 점검’ 등의 제목이 신문에 등장하면 전시장에는 파리만 날렸다고 전했다. 수입차 업계는 외환위기 때 직격탄을 맞고 비틀거렸다. 벤츠를 타던 고객들은 이웃 눈치가 보인다며 차를 내다 팔았다. 주차된 차가 못으로 긁히거나 타이어가 펑크 나는 일도 많았다. “한 해 1000대 정도던 한성자동차의 판매 대수가 1년 만에 100대로 줄었어요. 정말 암담했죠.” 정 상무는 98년 광장동 영업소가 문을 닫으면서 세일즈 가방을 들고 빌딩숲을 돌아다녔다.

 한성자동차 반포전시장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정 상무는 요즘 수입차를 보는 국민의 시선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고 했다. “예전엔 전시장에 오는 고객은 거의 다 ‘○○그룹 2세’처럼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었어요. 지금요? 직업도, 나이도 매우 다양하죠.” 그는 무엇보다 수입차를 이상하게 보는 사회적 시선이 거의 사라진 걸 느낀다고 했다.

 ‘사장님 차’ 위주였던 차종도 몰라보게 다양해졌다. 벤츠만 해도 3000만원대 소형차부터 스포츠카, 대형 세단까지 팔고 있다. 그는 “요즘엔 저도 모를 정도로 별의별 차가 다 한국에 상륙하고 있다”며 “취향과 경제력에 따라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훨씬 넓어졌다”고 말했다. 그가 보는 수입차 시장 전망은 매우 밝다.

 “국산차를 타다 수입차로 갈아타는 고객이 부쩍 늘고 있어요. 올해 ‘마(魔)의 벽’이라는 점유율 5%를 돌파했습니다. 소비자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수입차와 국산차의 경쟁은 내년에 더 치열해질 겁니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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