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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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나는 책상 위의 책들을 싸악 쓸어버리고 거기에 두 발을 포개서 올려놓았다.책들이 방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걸상을 잔뜩 뒤로 누이고 두 팔을 깍지껴서 머리 뒤를 받쳤다.나는 낮잠이나 잘까 하고 생각하다가 괜히 짜증 이 났던 거였다. 1994년의 2월 말이었고 나는 곧 대학생이 될 몸이었다.더이상 고등학생이 아니었고 더욱이 고3은 아니었다.며칠 전의 졸업식에서는 하영이가 졸업생을 대표해서 답사를 했다.누군가재학생 대표로 송별사를 했는데 지난해에 하영이가 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하영이의 답사도 어쩌면 지난해의 것과 비슷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영이는 이번에는 내게 미리 원고를 한번 손봐달라거나 하지는않았다.어쩌면 지난해에 내게 그런 부탁을 했을때 내가 별로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어쩌면 이제는 나를 더이상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그런 걸 깊게 생각해보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현상은 다만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하영이는 우리학교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고 선생들은 말했다.우리 졸업생 남녀를 통틀어 일류 국립대학의 의대에 입학한 유일한 졸업 생이었다.
아직 대학 입학식까지는 며칠이 남아 있었다.그래서 나는 진공상태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이쪽 우주에서 저쪽 우주로 건너가는 블랙홀같은 곳을 지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창밖으로 보이는 좁은 뜰에는 몇가지 꽃과 키작은 나무들이 아직은 헐벗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을씨년스러워 보였다.계절이 바뀌고 있으니까 봄이 오고 있으니까,과연 저것들도 다시 기지개를켤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나는 억 지로 억지로 겪어낸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았다.끔찍한 일이었다.나는 다시 세상과 정상적으로 섞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약간은 걱정이되었다. 졸업식날,교장선생님은 내 어깨를 토닥여주시면서 그랬다. 『지금 같은 학교라는 게 달수한텐 맞지 않았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내 말은 진심이었다.나는 교장선생님을 꼬옥 껴안아드리고 싶었다.교장선생님이 그 뒤에 생략한 말을 나는 대강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까지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또 교장선생님에게 말했다.
『그런데 신혼재미는 어떠세요 선생님.요즘에 더 젊어지신 것 같은 건 사실이지만요.』 『그래,이렇게 좋은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어.하여간 염려해줘서 고맙구나 녀석은.』 내가 고3이었던 동안에 발생한 사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가 그거였다.오십도 반 이상을 넘긴교장선생님이 여름방학 동안에 느닷없이 시집을 가버리신 거였다.
개학을 해서 학교에 갔을 때 단연 톱뉴스거리가 그거였다.상대 역시 어떤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라고 했다.교장들이 모이는 무슨 세미나에서인가 두 분 사이에 정분이 들었다는 게 정설이었다. 나는 용돈을 톡톡 털어서 산 여자잠옷을 싸들고 교장실에 찾아갔다. 『저는요,언젠가 사랑에 빠지실줄 알았어요.조금 늦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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