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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논단>12.12사태 下.사회.문화害惡-언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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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0년 언론 통폐합조치로 신문 11개,방송 27개,통신 6개등 44개 언론사가 문을 닫거나 경영권을 빼앗겼다.
전국 63개 언론매체중 3분의2이상이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방송의 경우 공영화 방침에 따라 종교등 일부 특수방송을 제외하고 모든 민방이 KBS로 통폐합됐다.
신군부는 당시 이를 언론의 건전하고 민주적인 발전을 위한 개혁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뒤 통폐합 이전 상태로 언론구조를 되돌려 놓는 신군부 세력의 자기부정이 5,6공내내 거듭돼야 했다.
우선 87년「6.29선언」으로 신문 창간 제한등 통제가 완화되면서 신문수는 불과 1년만에 통폐합 직전 상태로 되돌아 갔다. 이어 90년6월 정부는 민방 TV허용을 골자로 하는「방송구조 개편안」을 발표,그해 11월 (주)태영을 지배주주로 하는 서울방송을 출범시킨다.
다시 민방을 허용함으로써 통폐합의 핵심논리인「방송 공영제」가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같이 통폐합안을 결재했던 두 주역인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前대통령이 스스로 장의사가 돼「통폐합의 시신」을 관속에 넣은 셈이다.
통폐합의 목적은 정권장악및 그 연장을 위한 언론 순치(馴致)였다. 이는 신군부안에서 은밀히 작성했던 내부 보고서에서 드러난다. 보안사가 작성한「언론종합대책」에는 통폐합의 목적을「언론의 저항 체질을 자율적 협조체제로 바꾸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신군부의 의도는 실제로 적중했다.
권력은 강압적인 통폐합 과정을 통해 언론사의 생사여탈권을 보여줌으로써「알아서 기는」언론풍토를 만들었다.
시국문제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보도지침을 보내 통제했다.
정권내 사적(私的)비리까지 통제대상에 곁들여 졌음은 물론이다. 통폐합의 충실한 집행자였던 이광표(李光杓)당시 문공부장관은88년 언론 청문회에서 80년 언론 조치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스스로 시인하기도 했다.
『언론인 출신이 결과적으로… 한마디로 정리해 언론자유의 신장에 기여를 못했을망정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데 대해 이 자리를 빌려 잘못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신문에 비해 방송의 폐해는 더 했다.
편성.인사권등 정부의 완벽한 통제를 받는 방송이 공영(公營)취지를 살리지 못한 것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방송뉴스가「땡全(저녁9시 시보와 동시에 全대통령의 동정을 첫머리에 편성)」으로 불릴만큼 국민들의 엄청난 불신을 샀다.
언론 통폐합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그 불법성과 反역사성이다. 신군부는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이광표.허문도(許文道)씨등 몇몇 언론계 출신 인사를 동원해 밀실에서 군사작전을 펴듯 은밀히 통폐합안을 계획했다.
이어 언론사주들을 보안사로 불러들여 자신들이 만든 양식에 따라 노략질하듯 포기 각서를 강요했다.
『사령관 간담회가 있다는 보안사 요원의 말에 속아 보안사에 들어 갔다가 회사를 강탈당했다.버텼지만 어쩔 수 없는 분위기였다.군인들이「어짜피 쓸 것 빨리 쓰고 나가라」고 집요하게 강요했고 밖에선「서빙고로 모셔」하는 고함이 들렸다.또 상대가 3金씨까지 손 본 보안사 아닌가.』 장기봉(張基鳳)당시 신아일보 사장이 증언하는 포기각서 징구(徵求) 과정이다.
『위관급 군인2명이 들어와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 가며 포기 각서를 강요했다.한사람이「이 양반 왜 이래.지하실에 가고 싶어」하면 다른 쪽이「지하실에 가면 창피만 당하니 빨리 쓰고 나가시지요」하는 식이었다.』 한 언론사주는 훗날 주위 사람에게 그날 당한 수모를 이렇게 회고했다.이 모든 과정은 분명「국가에 의한 불법행위」였다.
군(軍)이 민간인인 언론사주들을 연행해 경영권 포기를 강요한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위배되는 명백한 사유재산 침탈이었다.
헌법과 언론관계법등 어디에도 통폐합을 합리화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었다는 것도 불법행위라는 방증이다.
정부가 나서 언론을 통제하려 한 통폐합 조치는 세계 언론의 흐름에 거스르는 시대착오적 발상이었다.
공영체제를 고집해온 몇 안되는 선진국중 프랑스(82년)와 독일.벨기에(86년)등이 우리의 5공기간중에 상업TV를 도입했다. 또 미국 CNN의 24시간 서비스 개시(80년),일본 전자신문 등장(87년)등 선진국들은 차근차근 뉴미디어 시대에 대비하고 있었다.
국경을 뛰어넘는 전자미디어 시대의 물결을 타지 못한 오늘의 우리 언론 상황도 바로 80년 통폐합 폭거의 치유하기 어려운 후유증인 것이다.
결국 통폐합 조치는 언론 분야에서 나타난 또 다른 12.12식 쿠데타였다.
〈李圭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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