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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싱가포르 리콴유처럼 국가를 바꿔놓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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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요?"

26일 오전 9시35분쯤 서울 서빙고동 신동아아파트 자택을 나서는 이회창 무소속 후보에게 기자가 '갈수록 얼굴이 좋아진다'고 인사를 건네자 환한 웃음으로 보인 반응이다. 그는 점퍼 차림이었다. 이 후보는 가까이서 봐도 얼굴에 잔주름 하나 없다. 짙은 머리 염색 덕분인 듯 그의 외모에서 5년간 정계 은퇴 시절을 읽어 내기는 어렵다. 달라진 건 출퇴근 시간이다. 2002년 때와 달리 그는 느지막이 출근하고 일찍 귀가한다. 젊어 보여도 그는 72세다.

그랜드카니발 승합차에 올라탄 이 후보에게 "5년 전에 비해 체력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는 "체력이야 뭐, 좋다. 괜찮다"고 말했다.

깊은 대화는 24일 오전 남대문 단암빌딩 21층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본지 전영기 정치데스크와 100분간 만났다.

그는 "나의 출마가 경선 불복에 해당하진 않지만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래서 피 말리는 고뇌를 했다"며 "그러나 정치는 때론 큰 원칙과 대의를 위해 소원칙과 소의를 희생시킨다. 큰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좌파정권을 종식하기 위해 출마했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면 이명박 후보는 좌파인가.

"공개적으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명박 후보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으려 한다."

-다시 묻겠다. 이명박 후보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

그러자 배석했던 이영덕 공보팀장이 "이명박 후보는 정체불명파"라고 거들었다.

이 후보는 이 팀장의 말을 이어 받아 "외관적으로 우파냐 좌파냐가 아닌, 실제 일관된 원칙과 철학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똑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똑같은 원칙과 철학을 가진 거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마산 초청 강연 때 구체적으로 얘기했다"고도 했다.(※이회창 후보의 9일 마산 강연 관련 발언="(이명박 후보는) 여러 의혹과 법적 혐의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국가지도자로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는가." "(대북 정책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거의 같다.")

이회창 후보가 26일 서울 남대문로 단암빌딩에서 열린 전국 연락소장 필승결의대회에 참석해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무소속인 이 후보는 지역 당원협의회(예전 지구당)가 없어 연락소장들을 지역별 책임자로 활용할 예정이다. [사진=강정현 기자]

◆"박근혜 마음으로 승복했겠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이명박 후보의 경선 승리에 승복했다.

"박 전 대표가 마음으로부터 자신보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적격이라고 생각해 승복한 것이냐. 당내 경선이란 절차와 형식에 승복한 것이다."

-박 전 대표는 또 이회창 후보의 출마에 대해선 '정도가 아니다'고 말한 바 있다.

"박 전 대표로선 그 얘기밖에 어떤 얘기를 더하겠는가."

-노무현 정권은 왜 좌파인가.

"자유보다 과도한 하향 평등주의에 집착했고 나라의 품격을 떨어뜨렸다. 남북 관계에서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하는 것도 일종의 하향적 평등 개념이다."

-진보 정권의 '잃어버린 10년' 논란이 있다.

"정직과 신뢰라는 정신적 기반이 제대로 서야 한다. 또 동맹과 외교가 중요하다. 한.미 동맹을 강조하면 사대주의라고 하는데 로마 제국도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쳐들어왔을 때 소소한 동맹국의 힘으로 로마를 지켜냈다. 큰 나라도 동맹이 필요하고 작은 나라도 동맹이 필요하다. 우리가 동맹을 너무너무 소홀히 취급했다. 개방도 필요하다. 제1개방은 구한말 때, 제2개방은 1993년 세계화 선언 때라면 이젠 제3의 개방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스스로 문을 열고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국을 싱가포르나 핀란드 규모의 연방 5~6개로 재편하는 연방제 국가개조론을 주장해 왔다.

"현행 법.제도 아래서도 어느 정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 개조 단계까지 들어가야 한다. 2002년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총리를 만났다. 그는 게으름과 가난의 싱가포르를 30년 만에 완전히 다른 나라로 만들었다."

-리 총리와의 만남을 통해 연방제 국가개조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가.

"(웃음) 그런 것도 있고. 정치를 떠나 미국 스탠퍼드대에 가 있을 때도 생각했고. 크고 길게 나라의 갈 길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가닥이 잡힌 것이다."

◆"당선되면 한나라당에 복당"

-당선된다면 한나라당으로 복당하느냐, 새로운 당을 만드느냐.

"한나라당은 내가 만든 당이고 떠났지만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결과를 가정해 이렇게 하겠다고 말할 수 없으나 어차피 같은 식구고 대의의 길이 확실히 되면 모두 같이 갈 식구들이다."

-보수 후보가 1.2위를 다투다 3위 후보에게 어부지리를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정적인 가정에 의한 물음엔 대답하지 않겠다."

-집권하든 안 하든 4월 총선 정치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정권교체를 하면 대통령으로서 할 일이 많다. 내년 총선도 정치적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패배할 경우에 대한 답은 안 하겠다. 장수가 패전에 대비해 싸우는 일은 없다."

◆한인옥 역할론엔 "소설 같은 얘기"

-출마를 결심한 데에 부인 한인옥씨의 역할이 있었나.

"소설 같은 소리다. 사실 가족이 제일 반대했다. 역사와 시대를 생각하는 신념이란 걸 알고 결국 동의해 줬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얘기가 있다. 이 후보도 한나라당 총재와 후보로서 차떼기 등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나 우리 스스로가 과거에 잘못한 게 많다. 중요한 건 정직하게 시인하고 정말로 정직과 원칙, 부패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개혁 결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특검법안이 국회 통과됐다.

"헌법의 취지에 맞게 시행하는 게 원칙이다. 중요한 건 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도 정치적 의도나 정파적 이해관계 등 정말 쩨쩨한 것에서 벗어나 정말 사회정의와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길인가 생각해서 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이 특검 대상에 이 후보와 관련된 2002년 대선자금을 포함시켰는데.

"공평하게, 공정하게 하자는 의도라고 아는데 여야 간 정쟁거리가 안 되고 넘어갈지 걱정이다. 선의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 후보와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문제를 두고 접촉, 협의했다는 얘기가 있다.

"글쎄, 그런 소설은 처음 듣는다."

정리=고정애.정강현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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