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DVD 번역 전예완씨 “한 단어 놓고 사흘 고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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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오페라를 보면서 ‘이제 저 가수가 침을 튀길 때가 됐는데’ 하고 맞힐 정도로 지겹게 봤어요.”

전예완(36·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씨는 이달 나온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DVD의 자막 번역을 맡았다. 번역은 문화의 토대라지만 독일어로 된 오페라 대사가 한글로 완역돼 DVD로 나온 건 처음이다.

전씨는 “절대 틀리지 않게 번역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고 말했다. 약 17시간짜리 영상을 몇 번 봤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돌려본 것도 정확한 번역에 대한 고집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지난 여름부터 바그너를 붙잡고 살았다.

“한번은 식탁에서 가족들에게 ‘반쪽 형제’와 ‘씨 다른 형제’ 중 어떤 말이 자연스러우냐고 물었더니 다들 밥 먹으면서까지 그 생각이냐고 하더라고요.” 작품을 줄줄 욀 정도로 본 까닭에 그는 “이제는 17시간이 단지 몇 분처럼 짧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가 ‘니벨룽의 반지’ 번역에 매달린 이유는 오류투성이 대본을 돌려봤던 매니어로서의 경험 때문이다. “제가 처음 바그너의 매력을 알기 시작한 대학원생 시절에는 바그너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한글 대사로 영상을 보는 수밖에 없었죠. 특히 연출가가 극중 상황을 바꾸면 대사도 적당히 바꿔줘야 하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이 힘들어요.”

전씨는 “극중 대장장이가 도끼를 ‘벼르다’라고 할지 ‘갈다’라고 할지를 사흘 동안 꼬박 고민한 일도 있어요”라고 전했다. 9월로 예정됐던 DVD 출시가 두 달 미뤄진 것도 이런 ‘확인에 확인’ 때문이었다. 산고 끝에 나온 한글 자막은 분량만 205쪽. 웬만한 책 한 권 수준이다.

그는 2005년에도 ‘니벨룽의 반지’를 번역한 적이 있는 ‘바그너 통’이다. 이 작품이 처음으로 한국에서 공연된 때에도 수개월을 들여 꼼꼼히 번역을 해냈다. 요즘에는 니체의 미학론을 공부하고 있다.

“김문환(한국 바그너회 회장) 지도교수의 의뢰로 공연번역과 인연을 맺게 됐어요. 하다 보니 바그너에 푹 빠지게 됐습니다. 바그너의 매력이요? 줄거리와 연기 등 극 전체가 하나의 음악이 되고. 음악은 말이 되는 것이죠.”

2005년 ‘니벨룽의 반지’ 공연은 나흘간 유료 관객 70% 라는 기록을 낼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바그네리안’으로 불리는 바그너 골수팬이 이렇게 많은데 한글판 DVD가 처음 나온 게 되레 이상하죠”라는 그의 말을 입증하듯 이번 DVD(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제임스 레바인 지휘)는 1차 발매분 500장이 출시 보름 만에 모두 팔렸다. 역시 ‘늦을 때가 가장 이른 때’인 모양이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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