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감정사 50점짜리 문항 경찰 교재 그대로 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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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올해 국가 공인 자격시험이 된 '도로교통사고 감정사' 시험에 대해 특혜 논란이 일고 있다. 시험을 주관한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공단)이 수년간 경찰관 교육에 사용해온 공단 내부 교재의 예시 문항을 그대로 출제했기 때문이다. 탈락자들은 "경찰관과 공단 직원을 위한 시험에 '들러리'를 선 꼴"이라며 재시험을 요구하고 있다.

도로교통사고 감정사는 교통 사고의 원인과 책임을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감정서를 발급해 주는 전문가를 말한다. 지금까지는 크게 활용되지 못했지만 올 4월 정부가 국가 공인 자격시험으로 인정함에 따라 앞으로 수요가 늘 것으로 예상된다. 손해사정사처럼 독립 사무소를 가진 '고소득 전문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달 치러진 1차 시험(객관식)에 1만여 명이 응시했다. 주로 퇴직.전직을 고려하던 40~50대였다. 문제는 1차 시험에 합격한 2000여 명이 11일 치른 2차 시험에서 발생했다. 2차 시험은 총 5문항 중 3개를 골라 풀이 과정과 답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 중 1번 문항(배점 50점)이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에서 내부 교재로 사용해온 '교통사고 재현 매뉴얼'의 121쪽 예제 5번(사진)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2002년 9월 발간된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의 ‘교통사고 재현 매뉴얼’의 121쪽 예제 5번. 경찰청과 공단이 주관한 도로교통사고 감정사 자격시험 1번 문항과 일부 문구, 단위 표기가 다를 뿐 유사하다.


2002년 발간된 매뉴얼은 공단이 경찰청의 위탁을 받아 실시하는 경찰관 교육에 사용됐다. 1회당 60명씩 매년 10여 차례 실시되는 강의다. 교육에 참가한 경찰관과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공단 직원들에게 매뉴얼이 배포됐다.

공단은 23일 1000여 명의 최종 합격자 명단을 발표했지만 탈락자들을 중심으로 항의와 함께 재시험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고모(46)씨는 "(국가 공인 자격증이 된 뒤) 첫 시험이어서 기출 문제를 구하지 못해 애태웠는데 알고 보니 경찰이나 공단 직원은 쉽게 구했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지기남 공단 자격관리팀장은 "전공 교수들에게 문제 출제를 의뢰, 수거하는 '문제은행' 방식으로 출제했다"고 말했다. 이번 시험에 공단 직원은 30여 명이 응시해 20명가량이 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단 측은 현직 경찰관의 응시 규모와 합격률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천인성 기자

◆도로교통사고 감정사=2002년 10월 민간자격증 형태로 시작됐다. 시험 과목은 ▶교통 관련 법규▶ 교통사고 조사론▶ 교통사고 재현론▶ 차량운동학 등이다. 민간 자격증 시절 총 2300여 명의 합격자가 나왔지만 법적 지위가 빈약해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국가 공인을 계기로 달라질 전망이다. 경찰의 교통사고 조사에 이의를 제기해 재판을 청구할 때 감정사의 조사 결과가 법원 판단에 참고 자료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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