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도 여행의 피로를 느낀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호 29면

며칠 전 ‘신의 물방울’ 원고 회의를 할 때였다. 언제나 그렇듯 “와인을 마실까”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어쩐 일인지 이날 남동생은 비장의 와인 샤토 레오빌 라스 카즈 1971년산을 “마시자”며 작업실의 소형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와인은 귀중품”이라며 끔찍하게 아꼈는데 별일이다 싶었다.

“무슨 일 있어?”라는 물음에 “실은….” 비통한 표정으로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동생이 소유한 이 소형 냉장고는 버튼 조작으로 온도를 높이고 내릴 수 있는 냉온장고다. 평소에는 와인용으로 16도에 맞춰 두는데, 이 버튼을 그의 막내 아이가 장난치다가 55도로 설정하고 만 것이다.

남동생은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몇 시간이나 방치했다고 한다. 이상을 느끼고 냉온장고를 열자 안에 들어 있던 여섯 병은 이미 따끈따끈하게 익어 있었고, 비참하게도 모든 병에서 와인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고 한다.

와인은 고온에 두면 변질된다. 반쯤 포기한 남동생은 그중에서 자크 카셰의 ‘에세조’ 2005년산을 조심스럽게 열어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상하지 않았어. 몇 시간쯤은 고온에 노출돼도 견딜 수 있나 봐”라고 말하는 남동생. 하지만 자크 카셰의 ‘에세조’는 2005년이라는 젊은 와인이라 체력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1971년산 라스 카즈가 무사한지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문제의 라스 카즈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색깔은 완벽한 벽돌색을 띠지 않는데 맛은 완전히 절정기를 넘어섰으며, 미묘하게 밸런스가 깨졌다. 1971년이면 보르도는 포도 작황이 좋은 해인데, 이 와인은 젊음을 잃고 할아버지가 돼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상했을지 모르겠군.”

남동생은 슬픈 표정으로 냉온장고 안에 있던 또 하나의 오래된 술, 도메인 자불레 베르셰르 ‘에세조’ 1975년산을 꺼냈다. 이것은 재불 와인 저널리스트 무슈 스도에게서 구입한 환상적인 와인이다.

그런데… 열어본 우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에세조는 상하기는커녕 젊고 싱싱하며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비터 초콜릿 향기와 붉은 과일 잼 같은 농후함. 여성적이지만 근육질에 군살 하나 없는 아름다운 운동선수라는 느낌이 났다.

같은 70년대 와인인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건지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스 카즈와 에세조, 둘 다 일류 생산자의 와인인데 한쪽은 55도의 열을 견뎌냈고 한쪽은 급속도로 늙어버렸다. 이런저런 원인을 따져보다가 결국 이렇게 결론지었다.

라스 카즈는 30년간 전 세계 대리점을 전전하며 피폐해졌지만 에세조는 프랑스에서 항공기로 직송해 온 거라 여행의 피로를 모른다. 30여 년간 쌓인 피로의 차이가 나쁜 환경을 이겨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낳은 것은 아닐까.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는 말이 있지만, 잘 숙성된 와인을 즐기기 위해서는 ‘가능한한 여행을 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번역 설은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