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까막눈 할머니' 한글 눈뜨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은행 갈 적엔 먼저 약국엘 갔어. 파스 사서 오른손에 붙이지. 은행 직원한테는 손을 다쳐서 그러니 대신 써달래려고. 한번은 은행 직원이 '왜 할머니는 맨날 오른손이 아프세요'하는데 민망해서…."(김순석.여.67.안양 시민대학 한글과정 졸업)

"아들 내외하고 사는데, 혼자 집보다가 어데 가고 싶어두 그럴 수가 없었어. 적어 놓구 나가야 헐 텐디 그릴 줄을(글 쓸 줄을) 알아야지."(조유순 할머니.81.시민대학 재학)

글을 모른다는 것은 이토록 답답하고 서러운 일이다. 전국 문해(文解).성인기초교육협의회에 따르면 이런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1만여명이 전국의 한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안양 시민대학의 국화반(한글 과정) 할머니 20명도 그 중 일부다. 나이는 50대 후반에서 80대까지. "집안도 어려운데 아들이나 가르치면 되지"라는 옛 관념에 희생돼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이들이다. 할머니들은 3년간 한글 공부에 매달린 끝에 마침내 결실을 거두게 됐다. 초등학교 수준의 한글을 마스터하고 다음달 졸업하게 된 것.

'돌아서면 까먹는'나이에 공부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서성순(74) 할머니는 "2년이 돼도 도통 쓰지를 못해서 그만두려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고비를 넘기니까 되대. 신이 나서 군대 간 손자한테 편지를 썼더니 '할머니 사랑해요'하는 답장이 왔어." 김명순(77) 할머니는 "손주 또래 선상님들이 자원봉사로 가르치신다는데, 어떻게들 착하고 고마운지"라며 교사들 칭찬을 잊지 않았다.

졸업하면 3년 동안 정든 교사들과도 이별하는데 서운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무슨 소리냐는 답이 돌아온다.

"나는 또 와서 컴퓨터 배우기로 했어."(서성순), "한문도 배워야지. 나는 죽을 때꺼정 여그 댕길 거인디."(조유순)

어느 광고 문구처럼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할머니들에게 배움의 길은 끝이 없었다.

글=권혁주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