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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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떠난 자와 남는자(34)혼잣말을 하며 걷던 은례는 문득 친정 생각을 한다.일할 사람도 없는데 두 노인이 또 어떻게 밭일들을 하시려나 생각하니 마음이 어둡다.
『아니,이게 누구야?』 뒤쪽에서 나는 소리에 은례는 몸을 돌렸다.재너머에 사는 먼 친척,본 지가 하도 오래라 은례 쪽에서도 놀란다.
몸빼차림에 머리에는 수건을 두른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였다.
『다들 안녕하시지요.』 『아,요새야 편한 사람이 병이지.우리같이 없는 살림에는 그저 대추나무 연 걸리듯 일거리라도 많아야그걸로 한 시름 잊고 사는 건데 뭘.』 머리에 둘렀던 수건을 벗으며 아낙네는 은례가 업고 있는 아기를 들여다 보았다.
『아이구,벌써 이렇게 컸네.』 『잘 먹고 잘 놀아요.』 『저런 벌써부터 효도하는구먼.애들은 그저 순해야지.너 나 없이 애기르는 에미한텐 그런 복이 또 어디 있다구.』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이 갈퀴같이 거친 것을 은례는 마음 아프게 돌아보았다.아이는 둘러업은 포대기 안에 그냥 잠이 들어 있었다.
『열매 될 나무는 첫 3월부터 안다고 했어.아이가 벌써 예사롭지 않구먼 그래.』 『무슨 그런 말씀은요.돌전에 걷기나 하려는지.』 아이가 워낙 순해서 늘 듣는 이야기였다.중얼거리듯 말했지만 어미된 마음에 아이 칭찬이 싫지가 않다.
『그나저나…읍내엔 어쩐 일이세요?』 『침쟁이 찾으러 왔다가….』 말하는 얼굴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침은 왜요? 누구 다치셨어요?』 『평지에 낙상한다더니 영감이 아직 덜 녹은 논둑길을 어정거리다가 다리를 삐었지 뭐야.』『아이구,어쩌다가.』 실없이 우스개 소리를 잘하던 사람 좋은 얼굴을 떠올리면서 은례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침쟁이 집에 다녀가시는 거예요?』 『집에 없고 어딜 나갔다는데 사람이 거동을 못 하니 짬나는 대로 좀 와 달라고 부탁을 하고 가는 길이지.농사꾼이 논둑에 자빠져서 다리를 부러뜨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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