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금호 현악4중주단의 브람스의 밤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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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9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금호현악4중주단의『브람스의 밤』은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해 주었다.94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입상자 백혜선을 새로운「멤버」로 맞아들인 이날 연주는 지금까지 들었던 피아노 5중주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보였다.외국 현악4중주단의 내한공연 때 국내 연주자들이 협연하면서 피아노 5중주가 볼품없는 곡이 되고 마는 경우가 많았는데백혜선의 경우는 달랐다.
이날 연주는 금호현악4중주단에도 중요한 경험을 제공했을 것으로 생각된다.피아노가 단순한 협연자가 아니라 현악4중주에 음악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프로그램을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와 5중주 2곡으로 꾸민 것만 보아도 이날 연주에서 피아노가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하게 된다.평소 스케일이크고 남성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던 백혜선은 피아노 4중주 2악장에서 피아니시모의 극치를 보여줌으로써 표현력의 깊이와 폭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그것은 그녀의 장기인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에서 느낄 수 없는 섬세함이었다.
물론 집시의 춤을 연상하게 하는 피아노 4중주의 4악장에서처럼「휘몰이」한바탕을 질펀하게 연출해 냄으로써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마디로 백혜선은 음악에서 침묵해야 할 때,나지막한 목소리가필요할 때,그리고 전면에 나서야 할 때 를 분간할 줄 아는 연주자다. 비올라(배은환)와 첼로(홍성은)도 브람스 특유의 음색을 창출하는데 큰 몫을 해냈다.지금까지의 연주회와는 달리 연주가 끝난 후 흡족한 연주자들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백혜선의 연주에 현악4중주의 음량이 압도당한감이 없지 않지만,지금까지 들었던 금호 현악4중주단의 색채와는사뭇 다른 연주였다.음질좋은 음반과 오디오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지만,아직도 연주회에 존재 이유를 부여해 주는「생연주의 축제」가 이런 것임을 보여주었다.
다만 느린 악장이나 피아노없이 현악기만으로 연주되는 부분에서복잡한 리듬을 잘 헤쳐나가는 앙상블의 묘미가 아쉬웠다.
또 한가지 아쉬운 것은 1악장이 끝나고 뒤늦은 입장객 때문에악장 사이에서 4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는 점이다.이것은 결국음악의 맥을 끊어 놓는 일이 되고 말았다.교향악단 연주회의 서곡에 해당하는 소품을 넣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초대권을 대량 배포하여 연주가 지연되는 일도 없어야겠다.
기업홍보의 차원이라면 모르겠으나,이제는 명실공히 국내 최고 수준임을 인정받은 실내악단으로서의 자신감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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