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게이츠가 평택 안 간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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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달 초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이 취임 1년 만에 처음으로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참석차 방한하게 되자 한국 정부는 한가지 '선물'을 기획했다.

주한미군의 새 터전이자 미국의 동북아 전략 허브가 될 평택 미군기지 기공식 발파 버튼을 누를 기회를 준다는 아이디어였다. 행사 일정을 그의 방한기간(6, 7일)에 맞춰 조정하려 했다.

이를 전해들은 게이츠 장관 측은 정중히 사양했다. 일정이 바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속내는 따로 있었다. 미 국방장관이 주한미군 기지 착공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기지이전을 반대해 온 단체들 중심으로 반미 캠페인이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달 남짓 남겨둔 대선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평택기지 기공식은 게이츠 장관이 한국을 떠난 엿새 뒤인 13일 치러졌다. 대신 게이츠 장관은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미군 비행기를 타고 평택기지 상공을 돌며 이전 지역을 꼼꼼히 둘러본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츠 장관뿐 아니다.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도 한때 기공식 참석을 고사했다고 한다. 그 역시 반미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고 걱정한 때문이라고 소식통들은 전한다. 그러나 잠시 방한한 게이츠 장관과는 다르다. 그는 평택기지를 책임질 주한미군사령관이다. 그마저 불참하면 오히려 한.미 동맹의 균열로 비쳐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런 주변의 설득으로 결국 벨 사령관은 참석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미 행정부, 그중에도 특히 미 국방부는 한국 대선을 앞두고 극도로 몸조심을 하고 있다. 2002년의 경험 때문이다. 주한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반미 감정이 폭발하고, 그 결과 반미 코드를 앞세운 대선 후보가 당선됐다는 후회 때문이다. 그 이후 한.미 동맹이 수많은 곡절을 겪어야 했다.

미 국방부의 이런 우려와 달리 한국의 상황도 많이 변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5년 전과 달리 반미나 친북 구호는 변수로서 힘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 특히 기회만 닿으면 안보까지 선거에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아닐까.

강찬호 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