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NIE] "매니페스토는 공약 내비게이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시끄러운 구호가 아닙니다, '정책 길잡이'입니다


그래픽 크게보기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약속을 결코 하지 않는 것이다."

약속 지키기가 힘들다는 것을 실감나게 표현한 나폴레옹 1세(1769~1821)의 말이다.

대통령 후보들이 온갖 공약을 내거는 '약속의 계절'을 맞아 정치인들의 공약을 유권자들이 심사하고 평가하는 매니페스토 운동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선거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활용되는 매니페스토의 의미와 가치, 적용 사례 등을 살펴본다.

◆매니페스토란=선거 입후보자와 유권자의 사회적 약속을 뜻한다. 라틴어의 '손(manus)'과 '치다.빠르게 움직이다(fendere)'의 합성어로 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할 때 하는 '선언.서약'을 뜻한다. 요즘은 후보자의 공약 제시와 실천, 유권자의 감시.감독.평가까지 아우르는 말로 쓴다. 공약을 따질 때는 목표.우선순위.이행 시기.이행 가능성.예산 확보 근거 등을 잣대로 삼는다.

◆어떻게 시작됐나=1834년 영국 보수당 대표인 로버트 필(1788~1850)이 유권자를 현혹하는 거창한 공약이 정치인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준다는 판단에 따라 공약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자고 제안하면서 태동했다. 1997년 영국 노동당 당수인 토니 블레어가 집권하면서 매니페스토를 강조해 다시 부각됐다. 매니페스토는 영국.일본처럼 내각이 정치적 책임에 민감한 나라에서 집권 전략의 하나로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5.31 지방선거 당시 중앙일보와 시민단체 등이 주도해 도입했다. 정당이 집권을 위해 매니페스토를 진행하는 외국과는 성격이 다른 셈이다. 유권자가 공약의 내용뿐 아니라 실천을 감시하는 즉, 수요자 참여형 운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왜 필요한가=매니페스토는 후보나 정당들이 정책 선거를 하도록 유도해 선진 정치 문화가 정착되도록 이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국내에서 이 운동을 주도하는 시민단체인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처장은 "정치인의 공약은 대개 예산 없이 집행하기 어려우므로 유권자들이 잘 감시해야 한다"며 "공약은 세금과 직결되므로 세금청구서 따지듯 꼼꼼히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상 생활 속의 매니페스토=시민단체가 주도한 덕분에 국내에서 매니페스토는 '생활 밀착형'으로 확산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서인덕 정책정당지원팀장은 "매니페스토의 핵심은 약속과 실천"이라며 "용돈을 탈 때 부모님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이나 신랑이 뱃살을 빼겠다고 신부에게 하는 다짐도 매니페스토에 속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부부.부모, 자녀.교사, 학생.노사 간의 약속에도 매니페스토를 적용해 봄직하다. 단 약속 내용을 문서로 작성해 이행 여부를 검증해 나갈 때 실효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매니페스토의 요람은 학교=안산 삼일초등학교(교장 정양근)는 지난 3월 전교 어린이 학생회장 선거에 매니페스토를 처음 도입했다. 선거 전에 입후보한 학생을 모아 실천 가능한 공약을 제시하도록 유도한 것. 그 결과 전교생이 선거에 관심을 갖게 됐을 뿐만 아니라 당선 학생이 공약도 철저히 지켰다. 이 운동을 도입한 송의서 교사는 "매니페스토를 진행한 뒤 학생들의 공약이 실천 가능한 구체적 내용으로 바뀐 게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왕따' 없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식의 공허한 약속 대신 블로그를 만들어 소외 학생의 고민을 같이 나누겠다는, 실현 가능한 공약을 제시한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학생회장 김준우(생명과학과4)씨도 매니페스토 덕을 톡톡히 봤다. 선거 전 6개월 동안 다른 대학의 총학생회장 출마자가 만든 '공약 묶음집'을 연구한 김씨는 21개 공약을 정해 구체적 개요와 실행 계획, 예산안 등을 제시해 '민심'을 얻었다. 예컨대 5000여 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KAIST 특성을 감안해 낮 시간 온수 공급 등 기숙사 복지를 약속했고 그대로 이행했다. 김씨는 매니페스토가 내비게이션과 같다고 강조했다. 사전 준비를 거쳐 구체적 내용을 공약에 담으면 당선 후 이 지도에 따라 실천하면 된다는 것이다. 유권자들 입장에서도 매니페스토를 통해 당선자를 통제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장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