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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후반전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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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글피에 있을 수능 말입니다. 수험생 부모님들, 얼마나 가슴 졸이고 계십니까. 이미 숯 검댕이 되셨겠지요. 발걸음조차 애처로운 아이들은 더할 겁니다. 심판대에 서 있는 것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을 겁니다. 당사자는 수험생들인데, 어른들이 더 욕심 부리고 조바심하는 건 아닌지요. 아이를 위한다며 무리하게 채근하고, 이웃에게 창피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어쨌든 아들딸들이 시험을 잘 치러야지요. 그래서 올 한 해 고생하신 보답을 받으셔야지요. 그러나 무릇 자식 일이란 부모 뜻대로 되는 건 아닌가 봅니다. 만의 하나 시험을 망쳐도 실망하진 마십시오. 인생을 길게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SK에너지 신헌철 사장은 3수 끝에 부산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삼성테스코 홈플러스 이승한 사장도 두 번의 입시에서 낙방한 뒤 영남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입니다. 신헌철 사장은 말합니다. “불행은 성공을 위한 보약이며 선생님의 회초리입니다. 3수, 그것은 내 인생 최대의 비료였습니다.” SK텔레콤 김신배 사장은 또 어떻고요. 중학교도 재수했습니다. 그는 고교 3학년 2학기라는 가장 급박한 시기에 자신의 인생을 확 바꾸는 모험도 했습니다. 외교관의 꿈을 안고 1학기 때까지 문과반에서 공부했는데, 2학기 때 이과로 옮겼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들은 인생의 후반전을 노린 분들입니다. 물론 전반전부터 후반전까지 계속 잘나가면 더할 나위 없지요. 그런데 전반전에 잘 못하다가도 후반전에 역전하면 기쁨은 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고두현의『시 읽는 CEO』에는 인생의 후반전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커넬 샌더스는 65세에 KFC의 첫 체인점을 열었다. 모건 프리먼은 30년간의 무명 시절을 딛고 58세에 오스카상을 받았다. 밀크셰이크 믹서기 외판원이었던 리에크록은 53세에 맥도널드를 창업했다. 전직 우주비행사 존 글렌이 두 번의 실패를 딛고 상원의원이 된 것은 53세 때였다. 권투 선수 조지 포먼은 45세 때 다시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수험생이나 부모님 모두 인생의 후반전을 염두에 두고 차분한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몇 년 전 어떤 CEO가 마련한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습니다. 바로 옆 자리에서 본 그분의 여유로운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체질적으로 느긋하고 웬만한 일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20여 년 전 그가 차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업무보고를 실수해 부사장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부사장은 성질이 불같기로 유명했습니다. 무려 30분이나 혼났답니다. 한참을 야단맞던 중 그는 문득 비서가 타다 준 커피가 식어 버린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무심코 커피잔을 입에 갖다 댔습니다. 그러자 떨어진 불호령. “야, 너는 욕먹으면서도 커피 생각이 나냐?” 부사장은 훗날 상공부 장관을 지낸 안병화씨고, 혼쭐나면서도 느긋했던 사람은 이구택 포스코 회장입니다.

부모님들, 여전히 마음은 콩닥콩닥 뛰겠지요. 그래도 이구택 회장처럼 여유를 가지십시오. 오히려 일이 잘 풀릴지도 모릅니다. 아직 자녀가 학교나 학원에 가기 전입니까. 그러면 당장 말해 주십시오. 이미 집을 나선 뒤입니까. 그러면 자녀가 귀가하면 꼭 얘기하십시오. 저도 오늘 밤 퇴근하면 제 고3 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렵니다. “오랫동안 고생했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되 마음은 편히 가져라. 인생을 길게 보자.” 이게 어디 수험생에게만 국한된 얘기겠습니까. 오늘 집에서, 직장에서 주먹 불끈 쥐고 이렇게 외쳐 보십시오. “그래, 인생은 후반전이야.”

정선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