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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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성식은 일단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면무슨 말이건 다 뱉어냈을 거였다.
통수형이 느끼한 미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백만원…? 나쁠 것 없지.그렇지만 너,그저 입에서 나오는대로 씹어대는 거라면 후회할 거야.이번 일까지 떠벌려서 또 사고를 치면 말이야,다음번엔 니 동생년까지 잡아다가 같이 껍데기를벗겨버릴테니까.알겠나.』 성식이 고개를 끄떡거리는데 도끼가 구두뒷굽으로 성식의 무릎 근처를 팍 찍으면서 쏘아붙였다.
『넌 아가리가 없니 새끼야.』 『알았습니다.정말요.』 『어느세월에 임마.』 통수형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일주일만 주세요.일주일이요.진짜요.』 성식은 그렇게 풀려났다.그리고 이틀을 더 고민하다가 아파트 십일층에서 뛰어내린 거였다.방학이 끝나면 악몽에서 헤어나겠지 하고 기대했다가 절망한거였다.성식의 일기에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순간적인 충동에 따른 행동 인 것 같았는데,그래서 일기만 가지고 도끼네 놈들을 잡아넣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성식이 마지막으로 쓴 일기에「성미까지 당하게 해선 안돼… 안돼… 안돼」라는 구절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도끼네를 응징하기 위해서 건영이에게 도움을 청했다.악동들만으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동우에게도 사정을 말하고 합류해줄 것인지를 물었더니 기꺼이 응해주었다.고수부지에서싸움이 났을 때 본 동우의 솜씨가 믿음직했던 거 였다.
나와 영석이가 성미를 데리고 다니면서 도끼네를 확인한 건 성식의 장례식이 있은 다음주였다.영석이와 나는 도끼네를 미행해서녀석들이 죽치는 당구장을 알아뒀다.도끼네가 거의 매일 오후에 시간을 죽이는 곳이 신촌의 독수리 당구장이었다.
『도끼 맞지? 넌 동수구… 그럼 니가 써머즈겠네.』 도끼네가당구장을 나서서 연대쪽으로 가는데 동우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도끼네는 2와 2분의1이구 우리는 여섯이었다.도끼와 통수가 눈알을 앞뒤로 돌려서 상황판단에 임했는데 옆에 섰던 건영이 다짜고짜로 발을 놀려 통수의 아래를 후렸다 .통수가 한순간 중심을잃고 길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일어나.튀다가 잡히면… 끝이야.조용히 따라와.』 통수가 한쪽 눈두덩이 벌겋게 된 얼굴로 일어섰다.도끼네는 일단 포기한것같았다.우리는 미리 봐두었던 공사장 근처의 공터로 도끼네를 끌고 가서 무릎을 끓고 앉게 했다.
『성식이가 죽은 거 알지?…나쁜 새끼들.』 승규의 발길이 도끼의 면상을 냅다 질러버렸다.도끼가 얼굴을 감싸쥐고 앞으로 거꾸러졌다.승규는 성식의 일에 대해서 별 말이 없었는데 어쩌면 너무나 열을 받아 그러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성식이가 죽었다구…?』 통수가 인상을 팍 쓰면서 중얼거리는데 승규의 주먹이 또 연방으로 날아들었다.나중에는 내가 승규를뜯어내야 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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