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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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민주주의가 최선의 제도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되면서 쇠락해 가는 나라가 있다. 필리핀은 나라를 버리고 미국.호주.캐나다로 떠나가는 사람이 올 들어 매일 3천명에 이른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시아의 보트 피플'이라며 개탄하고 있다.

1986년 1백만명의 시위대가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을 쫓아냈을 때만 해도 이 나라는 꿈과 희망과 낙관이 넘쳤다. 그런 나라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민주주의를 한다지만 민주주의 중에 가장 저급한 포퓰리즘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화배우(영화배우 직업을 폄하해서가 아니다)가 대통령이 됐다가 쫓겨나고, 이번 5월 대선에도 또 다른 영화배우가 유력한 후보자로 부상하고 있다. 그 나라에서는 인기가 중요한 잣대다. 지금 대통령인 아로요도 상류 출신에, 경제학 박사이긴 해도 저급한 민주주의를 끌어올리지 못했다. 인기도에 따라 공무원 인사를 하고, 직원들이 반대한다고 공기업 사장을 쫓아냈다.

*** 포퓰리즘에 빠진 나라는 쇠락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잘되는 쪽과 못되는 쪽의 두가지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려면 대표를 잘 뽑아야 한다. 능력있고 훌륭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그 제도의 속성상 좋은 대표가 나올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뽑으려 하는 경향이 있고, 후보로 나선 사람들은 좋은 정치를 향해 경쟁하기 때문이다. 혹시 부족한 사람이 뽑혔을 경우라도 다음 선거에서 갈아치우면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최악의 상황은 셋째만 작동하는 경우다. 민주주의를 한다 하여 매번 투표는 하지만 나쁜 대표만 뽑는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대표자로 뽑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 잘난 사람은 괜히 싫고 비슷한 사람,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경쟁심일 수도 있고 질투일 수도 있다. 그러니 대통령후보가 가난 경쟁을 해야 하고 좋은 학벌.경력이 오히려 단점이 된다. 어리석음도 문제다. 속사람은 보지 못하고 번지르르한 겉만 보는 경우다. 필리핀 사람들이 영화배우 대통령을 좋아하는 것이나, TV로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을 경쟁하듯 모셔가는 우리 경우가 그런 것이다.

대표자가 되려는 사람들 간에 어떤 경쟁을 하는가도 중요하다. 좋은 방향의 경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나라에 해악만 끼치는 쪽으로 경쟁할 경우 민주주의를 할수록 나라가 어려워진다. 개인이나 나라나 살아가는 진리는 똑같다. 제대로 된 집이라면 현재가 어렵고 고달프더라도 미래를 위해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라도 그래야 한다. 아버지가 식구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눈앞의 달콤함만을 말한다면 그 집안이 제대로 되겠는가. 성장과 분배의 문제도 그렇다. 분배를 말하는 쪽이 훨씬 더 인기가 높다. 단순한 사람들일수록 그런 유혹에 약해지기 쉽다. 제대로 된 정치라면 이를 경계하고 올바른 것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정당들은 어떤 방향의 경쟁을 하는가. 한쪽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나가면 다른 쪽이라도 묵직하게 나가야 한다. 한쪽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면 다른 쪽이라도 마음 깊숙한 곳을 감동시켜야 한다. 한쪽이 달콤한 현재를 말하면, 다른 쪽은 힘들더라도 미래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힘들더라도 바른 정책 주장해야

한쪽이 노란 잠바 입고 시장을 돌며 민생투어를 한다니까 덩달아 뛴다. 어떻게 하루 동안 시장바닥을 돈다고 민생이 달라지겠는가. 충청표 얻자고 수도이전 한다고 하니까 잘못된 방향인 줄 알면서도 충청 민심이 무서워 "나도!"하며 따라나선다. 이라크 파병이, 자유무역협정이, 국익을 위해 불가피하다면 인기가 없더라도 바른 주장을 해야 하는데 눈치만 본다. 우리 정당들은 진보와 보수, 좌와 우를 떠나 지금 민주주의의 가장 저질적인 형태인 포퓰리즘을 경쟁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가 비관적인 것은 실업이 늘어나서, 경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선거를 하면 할수록 나라가 천박해지고 가벼워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대가 희망이 없다면 다음 세대라도 잘 길러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만병통치약을 파는 정치 약장수에 현혹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치 서커스에 넋을 잃지 않도록, 너무 가벼워서 날아가지 않도록, 중심이 잡힌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좋은 교육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문창극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