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진보와 개혁을 혼동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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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진보는 역사발전의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 땅의 현실 위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전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옛날에 진보의 이름으로 탄생된 운동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세계의 진운(進運)에 맞지 않는다면 지나간 역사 속의 진보일 따름이며, 과거의 진보일 뿐이다.

만약 19세기의 대표적 진보사상가 칼 마르크스가 오늘 이 시점에 살고 있다면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그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그는 물적 기반을 사상의 기반으로 생각하는 학자였다. 19세기 산업사회에서 가치 생산의 기본은 단순 육체노동이었다. 그러므로 상품 가치를 잴 수 있는 가장 기본적 단위는 사회적으로 필수적이며, 평균적인 노동시간이었다. 21세기의 오늘에는 지구적으로 특출나며, 창조적인 지식력이 사회의 중심적 가치를 생산한다. 가치 측정의 기본은 시간으로 잴 수 없는 지식생산물인 아이디어나 특허, 디자인.브랜드.비즈니스 모델 등이다.

19세기와 확연히 다른 이 시대의 역사적 진보를 위해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의 학문적 성향으로 본다면 아마도 신물질을 개발하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가 됐거나, 지식정보사회와 세계화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자가 됐을 것이다. 그의 운동가적 소양으로 본다면 벤처사업가가 아니면 시민운동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불로소득을 억제하고 시장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경제정의 운동을 하거나, 식의약품의 안전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장애인 보호운동 등 시장경제가 미처 고려할 수 없는 부문의 운동을 할지도 모른다. 19세기와 확연히 다른 물적 기반을 가진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서 그는 19세기의 진보인 계급론적 저항운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보수를 나누는 기준은 물적 기반과 관계가 없다. 경험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구분의 기준이 국가안보, 평화, 미국 및 북한과의 관계, 국가보안법 존치 여부, 개방에 대한 태도 등이다. 안보보다 평화를 주장하고, 미국보다 북한을 가깝게 여기며, 국가보안법은 당장 철폐해야 하고, 개방에 반대하면 그는 진보진영에 있다. 21세기 세계의 시계에 한국의 시간을 맞추고자 하는 개혁론자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 있다.

2002년 여야 정당에서는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경선을 실시했다. 여당의 개혁노선을 대표하던 어느 후보는 정치인의 진보.보수 성향을 묻는 설문에서 다른 후보들에 비해 오히려 보수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토론자들이 그의 쇄신 이미지와 보수적 입장 사이의 괴리를 파고들었다. 최근 있었던 열린우리당 당의장 선거에서도 그는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이러한 혼란은 그의 입장에 괴리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개혁과 진보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론자들은 한국을 21세기의 세계일류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국가란 교육개혁을 하고 과학기술이 중심이 되는 혁신주도형의 지식정보국가다. 효율적인 네트워크 국가이며, 세계로부터 인정과 환영을 받는 나라다. 과감한 행정개혁을 하고 환경과 효율성이 조화를 이루는 국토를 건설하며 대외 개방을 본격화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도달하는 나라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성향을 구분하는 2 X 2 좌표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 가로축에는 진보와 보수가 있으며, 세로축에는 개혁과 수구의 변수가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세력 중심에는 수구적 진보세력과 수구적 보수세력이 권력투쟁형 싸움을 벌이고 있다. 만약 이 다툼이 합리적 정책대안으로 대체되고 개혁적 진보세력과 개혁적 보수세력이 논의의 주역이 될 수 있다면 한국의 미래는 희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이각범 한국정보통신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