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시장 변화 못 따라가는 공정위 정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3면

정보통신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공정거래위원회의 경쟁정책은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선수들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경기장에서 새로운 형태의 경기를 하는데 반칙을 잡아내야 할 심판은 경기의 룰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환경=다음커뮤니케이션은 2001년 9월 "마이크로소프트(MS)가 컴퓨터 운영체제인 윈도XP에 메신저를 끼워 팔고 있다"며 공정위에 신고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2년5개월째 이 문제에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고민 중이다.

MS의 끼워 팔기는 과거 같으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불공정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각종 다기능 복합상품이 나오면서 불법적인 끼워 팔기를 규정하기가 모호해졌다.

예를 들어 카메라가 장착된 휴대전화에 대해 카메라를 끼워 팔았다고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통적인 업종 구분도 허물어지고 있다. 케이블TV 방송 사업자(SO)들은 케이블이 지나가는 관로 (管路)를 KT에서 빌려 쓰고 있는데, 지난해부터 5개월째 임대료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 SO는 방송업체이고, KT는 통신업체지만 케이블을 통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가능해지면서 충돌이 생긴 것이다. KT는 "방송용으로 임대해 인터넷용으로 사용하면 계약 위반"이라는 입장인 반면 SO들은 "KT가 일종의 공공재인 통신망을 독점해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특히 유.무선 통신망은 대형 업체 한두곳이 보유한 망(네크워크)을 다른 업체들이 빌려 써야 하는 구조여서 필수 설비의 이용을 둘러싼 갈등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기준부터 마련해야=지금까지 공정위의 결정은 기업들의 혼란을 해소하는 데 역부족이다. 공정위는 2001년 3월 삼성카드 등 7개 카드사가 신한카드에 대해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공동결제 시스템(가맹점 공동망)을 사용하려면 이용료를 내라고 한 것에 대해 '시장 진입을 막는 불공정 행위'라며 36억여원의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무임 승차가 가능해져 초기 투자나 기술 개발이 등한시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네트워크 설비를 무기로 경쟁을 제한해선 안 된다는 결정이었다.

반대로 2000년 4월 SK텔레콤과 신세기 통신의 합병에 대해선 독과점 우려가 있지만 기술 개발 증대와 통화 품질 개선 등의 효용이 크다며 시장 점유율을 낮추는 조건으로 합병을 허용했다.

광고성 e-메일에 발송료를 물려 경쟁 업체의 영업을 제한한다는 논란을 빚었던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온라인 우표제에 대해선 2년여 고민 끝에 "현재로선 법 위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며 결론을 내리지 않기도 했다.

서울대 이상승 교수는 "달라진 시장 환경에서 공정위가 어떤 기준으로 경쟁 정책을 펼지가 분명하지 않다"며 "과거 기준에 따른 경쟁 제한 여부만 강조하기보다 기술 발전과 소비자 편익을 충분히 고려한 기준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권명중 교수는 "기술 개발에 따른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계량화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김영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