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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있는 것’에 눈 뜨면 삶도 가뿐하고 죽음도 가뿐하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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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열다섯 살 때였다. 소년은 마을 근처의 절에 놀러갔다. 거기서 동자승을 만났다. 동자승은 명구(名句) 한 구절을 읊었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다(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띠끌이다).”
 어린 마음에도 소년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갈 길이 바로 이것이구나.” 그 길로 소년은 몰래 집을 나와 출가를 했다.

 그가 바로 무비(無比·64) 스님이다. 통도사와 범어사 강주도 지냈다. 10년 넘게 선방에서 참선도 했다. 지금은 범어사 승가대학장을 맡고 있다. 185㎝ 큰키에 기백도 당당하다.
 그런데 스님은 지난 3년간 문밖 출입을 못했다. 허리를 다쳐 하반신을 못 썼기 때문이다. “다들 가망이 없다고 했어요. 그때 ‘눈앞의 죽음’을 겪어봤죠. 껄껄껄.”

당시 방안에 누워서도 인터넷에서 ‘염화실’(http://cafe.daum.net/yumhwasil)이란 카페 법당을 차렸다. 직접 마이크를 잡고 동영상 강의도 했다. 지금껏 등록한 회원만 1만 명이 넘는다.

 명구 한 구절에 삶을 바꾼 스님이 최근 선어록 모음집 『무비 스님이 가려 뽑은 명구 100선(4권세트 3만5000원, 각 권 9000원, 불광출판사)』을 냈다. 네 권 모두 제목에 ‘소’가 들어간다. 최근 서울을 찾은 무비 스님을 만나 그 ‘소’를 물었다.

 -‘진흙소가 물 위를 걸어간다’가 첫째 권의 제목이다. 진흙소가 물에 들어가면 어찌 되나.
 “녹아버린다. 상식적인 선에선 그렇다. 그래서 이 말이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잠깐 한 생각을 돌이켜 보라. 자연 현상은 물론,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불만, 우주를 여행하는 꿈까지도 ‘공(空)’일 뿐이다. 텅 비어 없는 것이고, 텅 비어 없는 것을 바탕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안목에선 어찌 보이나.

 “진흙소만 물 위를 걸어가는 게 아니라, 물로 만든 소도 물 위를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진흙소는 진흙에만 있나. 진흙소가 물 위를 건널 때 ‘소’는 어디에 있나.

 “소는 어디에나 있다. 진흙 속에도 있고, 진흙 밖에도 있다. 물속에도 있고, 물 밖에도 있다.”

 -책에는 “밖에서 구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안은 어디고, 밖은 어딘가.

 “안은 자기 자신이다. 밖은 ‘자신’외의 명예, 돈, 권력 등 세속적인 가치관이다. 부처님은 새로운 가치 창조를 말씀하신 게 아니다. 인간의 본래 가치를 발견해서 일깨워 준 것에 불과하다. 부처님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 대해 눈을 뜨라는 얘기다. 눈을 뜨면 뭔가. 그게 ‘견성(見性)’이다.”

 -사람들은 지지고 볶는 일상을 살고 있다. ‘견성’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깨닫기 전과 후는 달라지는 게 없다. 그 전 그대로 살 뿐이다. 외양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내면은 달라진다. 특히 인간의 삶에서 맛봐야 하는 굉장한 기쁨, 엄청난 절망, 잊지 못할 고통 앞에서 그 차이가 ‘확!’ 드러난다.”

 -그게 어떤 차이인가.

 “도인일수록 폼 잡지 않는다. 정말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을 가진 도인일수록 더 인간적이다. 더 슬퍼하고, 더 기뻐한다. 그러나 거기에 젖지 않을 뿐이다. 기뻐하되 기쁨에 물들지 않고, 절망하되 절망에 물들지 않는다. 물론 불의를 보면 분노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분노해도 감정의 움직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고통과 절망 속에 있어도 ‘나’가 상하는 일이 없다.”

 -‘나’가 상하지 않으면 어떤 삶이 되나.

 “가뿐한 삶이 된다. 살기가 아주 쉬워진다. 죽음까지도 가뿐하게 느껴진다. 삶도 가뿐하고, 죽음도 가뿐하다. 그게 ‘생사해탈’이다. 생사해탈이 별다른 게 아니다. 삶이 뭔가. 인연 따라 세상에 관광 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면 당연히 돌아가는 것이다.”
 무비 스님은 자신이 입적할 때 다비식도 않겠다고 했다. 괜히 산 사람들 번거롭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몸은 그동안 입었던 옷이니 그냥 벗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미 ‘시신기증’ 서약까지 해놓은 상태다.

 -그 자리에서 인생을 보면.

 “하수들이 바둑 둘 때 고수의 눈에는 다 보인다. 곧 죽을 자리에 돌을 놓는 것이 빤히 보인다. 인생에도 그렇게 수가 보인다. 사람들이 남의 바둑 훈수 둘 때는 2급 이상 실력이 더 높아진다고 하지 않나.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둑에 ‘내’가 없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에 ‘내’가 없으면 지혜가 생긴다. 그래서 인생에서도 고수가 된다.”

 -스님 책에서 ‘돌아갈 길을 잃는다’란 당나라 한산의 선시(禪詩) 구절이 눈에 띈다. 무슨 뜻인가.

 “참 멋진 말이다. 한참 공부할 때는 그래야 한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채 몰두해야 한다. 어떤 분야를 택하든 마찬가지다. 선(禪)에선 궁극의 자리에서 그 의미를 알게 된다. 그 자리는 ‘돌아감’ 자체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선, 그 자체가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최근 불교계 일각에선 주지 선출 문제와 종단 내 계파 정치 등 본질에서 벗어난 모습이 보였다. 왜 그런가.

 “승려는 프로여야 한다. 프로에겐 프로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승려가 됐다면 불교를 깊이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심취해야 한다. 그렇게 심취하면 ‘나의 전부’를 쏟게 돼있다. 혼신의 힘을 바치게 돼있다. 그런데 불교도 모르고, 심취도 못하니 밖에서 찾는 거다. 돈과 명예, 권력 등 세속적 가치를 찾는 거다. 승려가 프로임을 잊어선 안 된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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