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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상승이 반가운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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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일본이 고유가와 달러 약세에 반색하고 있다. 지구촌 전체가 인플레(물가 상승)로 홍역을 앓는 것과 대비된다. 일본은 1998년부터 세계에서 유일하게 물가가 줄곧 하락(디플레)하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았다. 일본은 이번 인플레가 자국 경제의 숨통을 틔워 줄 청신호로 여기고 있다.

일본은행은 지난해 물가가 반짝 오르자 ‘디플레 탈출’을 선언하며 성급하게 제로금리를 해제했다. 하지만 판단 착오였다. 그 이후 일본 소비자물가지수가 다시 7개월 연속 마이너스로 떨어진 것이다.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일본 재무상은 26일 “일본 경제는 디플레이션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일본은 오랫동안 인플레 유도에 안간힘을 써 왔다. 디플레는 일본의 연금 생활자들을 어렵게 만들고 기업 투자도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물가가 ‘플러스’로 돌아서야 현재 2% 안팎인 경제 성장의 폭이 커지고, 제로금리에서도 완전히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격 인상 봇물=다행히 최근 일본에는 가격 인상이 불붙고 있다. 일본 굴지의 제빵 회사인 야마사키(山崎)제빵은 12월부터 식빵 가격을 평균 8% 올리기로 했다. 83년 이후 24년 만의 가격 인상이다. 회사 측은 “기술 혁신과 인건비 절감만으로는 현재의 가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 최대 조미료업체인 아지노모토(味の素)와 메이지(明治)유업·닛신(日<6E05>)식품·롯데와 같은 대형 식품회사들도 앞다퉈 가격을 올리고 있다. 화장실 필수품인 티슈 값도 10% 넘게 올랐고 일부 식용유 제품은 최고 40%까지 인상됐다.

가격 인상 도미노를 틈타 덩달아 가격을 올리거나 내년 이후 가격 인상을 예약해 두는 기업까지 나타나고 있다. 혼자 덜렁 가격을 올렸다가 소매점과 소비자들의 뭇매를 맞기보다 가격 인상 러시에 한꺼번에 묻어 가겠다는 전략이다.

가격 파괴 첨병이던 외식업계도 가격 인상으로 돌아서고 있다. 스타벅스는 카페라테 값을 20~40엔가량 올렸다. 저가 판매 전략을 고집해 온 맥도널드도 올 상반기부터 전략을 변경했다. 초콜릿회사들은 과자의 양을 줄이는 ‘편법’을 통해 사실상 가격을 올렸다.

가격 인상 쓰나미는 서비스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도쿄전력은 29년 만에 전기요금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지진으로 일부 원전 가동이 중단되고, 원유 가격이 급등함에 따라 내년에 적자에 빠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맨의 발’인 일본 국내선 항공요금도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일본항공(JAL)은 “고유가가 부담스럽다”며 “가격 인상 없이는 현재 수준의 서비스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체감 물가만 올라=일본이 가격 인상 러시를 마냥 마음 편하게 바라보기는 어려운 입장이다. 체감 물가와 물가 지표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생활필수품은 가격 변동 폭이 크거나 신선식품이라는 이유로 통계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물가 통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전제품이나 자동차·정보기술(IT) 상품들은 기술 혁신과 합리적인 설비 투자로 가격하락세에 좀체 제동이 걸리지 않고 있다. 결국 원유 등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식품·전력·교통요금 등 생활필수품 가격만 집중적으로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행 관계자는 “전체 물가지수는 하락하면서 장바구니 물가만 오르는 기현상이 빚어졌다”며 “이러다간 이극화(二極化·한국의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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