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할머니와 손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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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원식(1932~) '할머니와 손녀' 전문

러시아말을 잘 모르시는 할머니

제 고려말을 모르는 손녀이긴 하나

고려말을 하시는 수밖에

얘, 나자야!

너 저기 건너편을 보느냐?

늙은이가 바로 눈앞에 서 있는데도

못 본 척하고 앉아 있는 저 젊은이들

넌 그런 애는 아니겠지?

그러자 소녀는 펄떡 일어나

멀찍이 가 서서 간다

할머니의 타이름 때문이 아니었다

제 고려말을 하시는 할머니와

한 자리에 앉아 가기 부끄러워서였다



알마티에서 비슈케크를 거쳐 사마르칸트로 여행하는 동안 많은 고려인을 만났다. 나와 같은 얼굴 형상을 하고, 같은 언어를 쓰는 수십만명의 사람이 중앙아시아의 도처에서 김치와 된장을 담가 먹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처음엔 쉬 믿어지지 않았다. 이들 중 다수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무국적자가 돼 유랑민의 삶을 산다. 민족국가로 독립할 수도 없고 원적지인 한국이나 북한에서도 그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양원식은 고려인이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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