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노조에 각서 쓰고 출근한 금통위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금융통화운영위원이 한국은행 노조원들에게 '각서'를 쓰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은 노조가 '낙하산 반대'를 외치며 며칠씩 김종창 신임 금통위원의 출근을 막자 金위원이 '중립적인 통화정책을 수립하고 임기를 준수하겠다'는 확약서에 서명을 한 것이다. 정부가 임명하는 차관급 금통위원의 출근을 저지한 한은 노조나, 내용이야 어떻든 사실상의 항복문서를 노조에 써준 金위원 모두 참으로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수십명씩 떼지어 힘으로 출근을 막은 한은 노조의 행위는 잘못이다. 이들이 금통위원 출근을 저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물론 금통위의 독립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할 수는 있다. 금통위원을 '전직 관료 자리용'정도로 생각하는 정부 자세도 잘못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노조원들이 정부가 임명한 인사의 '자격'을 시비삼아 출근저지 등 극렬 투쟁을 벌인 것은 말이 안 된다. 민간 기업도 그렇듯 정부 역시 인사는 명백히 노조의 권한 밖이다.

金위원의 행동 또한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잘못된 처신이다. 아무리 출근이 급하기로서니, 은행장까지 지낸 그가 노조 사무실을 찾아가 각서를 쓴 것은 금통위원으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 금통위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같은 권위를 갖지 못하는 데는 최고의 명예직에 대한 자부심보다 자리 보전에 급급한 위원 스스로에도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사태로 인한 후유증은 결코 작지 않다. 단순히 金위원 개인의 일로 끝나지 않고, 가뜩이나 혼란한 한국의 노사 관계에 더욱 나쁜 영향을 미칠 선례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를 빌미로 다른 노조들도 툭하면 '각서'를 요구하면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노조의 이런 식의 월권과 억지 때문에 외국인들이 투자를 기피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과연 이런 사람이 금통위원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법을 준수해야 할 정부의 고위직이 노조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룬 데 대해 당사자가 책임을 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