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자본 역차별" "사금고 변질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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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분리와 산업은행 민영화가 대선 정국의 가장 민감한 대치전선이 되고 있다. 대기업의 은행 지배를 막느냐, 허용하느냐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성장론자와 분배론자가 치열하게 부딪치는 최전선이다. 나아가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와도 맞닿은 문제라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대선 후보들의 경제관을 뚜렷이 구분 짓는 잣대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는 18일 핵심 쟁점을 놓고 상반된 입장을 밝히며 격돌했다.

◆금산분리 왜 문제인가=금산분리는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은행 민영화에서 출발했다. 정부 소유의 은행을 인수할 수 있는 곳은 재벌 그룹뿐이었다. 문제는 은행을 대기업 손에 넘겨주면 사금고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든 것이다. 그래서 산업자본이 은행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지분 제한을 설정했고, 이것이 첫 금산분리였다.

97년 외환위기는 금산분리를 강화시켰다. 계열 금융회사의 부실로 그룹 전체가 위기에 빠지는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2000년에는 재벌 계열 금융사가 비금융 계열사 지분을 5% 이상 갖지 못하게 하는 규정도 신설했다.

금산분리는 그 이후 상황이 반전되면서 다시 도마에 올랐다. 대기업들이 앞다퉈 부채를 줄이고 현금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보유 현금이 넘쳐 은행을 소유하더라도 굳이 사금고로 만들 이유가 없어졌다. 여기에다 부실 은행 매각이 외국 자본의 독무대가 되면서 국민 정서도 변하기 시작했다. 산업자본의 손발이 묶인 상황에서 제일은행.외환은행 등을 인수한 해외 투기자본은 천문학적인 차익을 남겼다. 다른 시중은행들도 절반 이상의 지분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갔다. 국내 대기업에 대한 역차별과 외국자본의 행태에 대한 국민의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세계 최대의 산업자본이던 미국의 GE가 발 빠르게 금융시장에 진출해 성공했다. 금융과 산업자본 간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시장이냐 정부냐=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국내 금융감독 수준이 낮고 대기업의 행태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금융산업은 정부가 칸막이를 치고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시장이 아직 미성숙한 만큼 대기업이 은행을 사금고화할 우려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폐지론자는 국내시장이 이미 충분히 성숙했고 국제화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기업이 은행 돈을 마음대로 빼 썼다간 은행 간 무한경쟁에 밀려 시장에서 퇴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심판'으로서 사후관리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금산분리를 둘러싼 양 진영의 대립은 은행을 산업으로 보느냐, 공공기관으로 보느냐의 문제와도 일치한다. 폐지론자는 은행도 제조업과 똑같은 산업으로 간주한다. 더욱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샌드위치 신세가 된 국내 제조업으로선 금융산업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막강한 해외 네트워크와 브랜드 파워를 가진 국내 대기업의 해외영업 노하우를 국내 금융산업에 접목하면 국내은행도 세계적인 은행으로 클 수 있다"고 말했다.

◆큰 정부 vs 작은 정부=산업은행을 비롯한 국책은행 민영화는 어떤 정부를 지향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 후보는 산은을 정책금융과 투자은행으로 나눈 뒤 후자는 민영화하겠다는 복안을 밝혔다. 정책금융은 살리되 정부가 개입하는 부분은 최대한 줄이겠다는 얘기다. 반면 정 후보는 남북 경제협력을 차기 정부가 추구할 블루오션(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유망시장)으로 꼽았다. 남북 경협을 추진하자면 산은과 같은 국책은행을 정부가 끼고 있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산은 민영화에서도 양 후보의 입장은 선명하게 나뉜다.

정경민.윤창희.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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